절대로 복수하지 말라 (창50:15~21)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던 요셉. 그가 17세가 되었을 때 형들의 안부를 알아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 도단에 가게 되었는데, 요셉은 그 후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평소 그를 시기하던 형들에 의해 미디안 상인에게 팔렸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부잣집 아들에서 머슴으로 살아야하는 기막힌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 후로 누명을 쓰고 옥에 들어간 요셉은 바로의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 앞에 서게 되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까지 됩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대로 7년 대풍년 후에 7년 대흉년이 들자 애굽에 식량을 구하러 오게 된 형들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가나안에 있는 가족을 데리고 와 애굽의 고센 땅에 살게 합니다(창42~46장).
문제는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방패막이였기 때문에 걱정 없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요셉의 형들은 불안했습니다. 요셉이 칼을 뽑아들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자기들이 한 짓이 있으니 보복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19~21).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이 공동번역에는 “내가 하나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싶습니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곧 원수 갚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복수를 했다가 저주를 받은 사례가 많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 세겜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야곱의 딸인 디나가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인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창34). 세겜은 디나를 심히 사랑하여 그녀를 아내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야곱의 아들들은 심히 분개하였습니다. 할례도 받지 않은 짐승 같은 외간남자에게 동생이 강간당한 것이 치욕스러워서 증오심과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하몰에게 할례를 받아야 우리가 한 민족이 되고, 동생 디나도 줄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속입니다. 그러자 하몰이 그 성읍에 출입하는 모든 세겜 남자들에게 할례를 명합니다.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로 인하여 고통을 받은 삼일 째 되던 날, 디나의 두 오라비인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읍에 쳐들어가 하몰과 세겜은 물론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고, 재물과 가축을 빼앗고, 여자와 아이들을 사로잡아왔습니다. 이 일은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던지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들을 축복할 때 시므온와 레위에게는 이스라엘 지파들 속에 흩어질 것이라는 저주를 합니다(창49:5~7).
요압의 이야기입니다. 요압은 다윗 왕국 확립에 큰 공을 세웠고, 다윗에게 일등공신이었지만, 복수심에 불타 이스라엘 군대장관 아브넬을 죽입니다(삼하3:27). 아브넬은 사울의 군사령관으로, 사울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자입니다(삼하2:8~10).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있었을 때 요압은 다윗의 군장으로,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군장으로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 전쟁에서 아브넬이 요압의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요압은 이 원한을 갚기 위해 때를 기다리다 다윗에게 항복하고 귀순하고 돌아가는 그를 쫓아가 죽입니다. 동생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입니다. 그런 그의 최후는 아브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다윗이 요압을 저주한 대로 되었습니다.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찌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찌로다”(삼하3:29). 또한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왕상2:6)고 하며 요압의 죄 값을 물게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성소 안에 숨어 있던 요압을 살해합니다(왕상2:34).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삼하13). 그런데 어느 날, 다말이 이복오빠인 암논에게 강간을 당하고 내쳐졌습니다. 압살롬은 이에 대해 함구하다가 2년이 지난 어느 날, 양털을 깎는 파티에서 형 암논을 죽입니다. 2년 동안 복수의 날만 기다리고 준비해온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저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삼하13:32). 결국 압살롬은 다윗군과 싸우던 중 도망하다가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삼하18:9~18).
여러분,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17:13). 악을 종결짓는 방법은 악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감싸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외워 기도하는 주기도문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6장 9절 이하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가 나오는데,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주기도문의 모든 기도는 다 주님께서 해주셔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로 뒷 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대고 더 치라 하기를 바라시고, 속옷을 가져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조르는 자에게 십리를 함께 가주며,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마5:39:44). 여러분, 그렇게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는 용서가 근간이 된 종교입니다.
용서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구원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이 적용되었더라면 어디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큰 은혜를 입고서 나를 조금 힘들게 한 자, 나를 모함 한 자, 나에게 손해 좀 입힌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기어코 복수하겠다며 이를 갈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어여삐 보실까요?
또 하나, 남을 흙탕물 속에 처박으려면 나도 흙탕물에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면 내 마음이 먼저 악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내가 먼저 죽을 맛이 됩니다. 독을 품고 있으니 먹은 것이 소화가 되겠습니까? 잠을 제대로 자겠습니까? 또 기도는 나옵니까? 그래서 내 영·혼·육이 먼저 시들고 엉망이 되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원수를 용서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눅23:34). 이를 본받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행7:60).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고, 선으로 악을 덮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할렐루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이겨라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자나
때린 놈은 웅크리고 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