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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화 인생

691호 · 2013-05-24

학창시절, 배우를 하겠다는 생각을 뚜렷하게 가진 적은 없었다. 특히 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외모도, 성격도, 모두. 그럼에도 내가 대한민국의 배우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처음에는 연출공부를 하기 위해서 연극영화과에 지원했었다. 졸업 작품을 연출하고, 학교 소속 극단으로 가게 되었지만, 학교의 연장선이라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어서 의 극단인 ‘학전’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나의 스승 김민기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몇 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었다. 내가 배우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영화는 과 , , 그리고 과 등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배역을 잘 표현해야 할 지 방법을 잘 몰랐다. 그리고 설경구가 아닌 영화 속 인물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되는지도 막막하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우연히 얻게 된 직업이었기에 더 많은 노력과 열정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했던 내가 나에게 주어진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탐구와 끈기, 열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 대본을 받으면 최대한 그 배역의 ‘옷’을 입고 살면서 그 인물처럼 살았다. 말투, 행동, 눈빛까지 모두 배역 속 인물이 되어 제2, 제3의 인물로 계속 바뀌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영화 속 인물이 되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보면 이렇다.

은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관심을 받았던 작품이었지만, 이창동 감독님과의 작업은 참으로 힘에 겨웠다. 주연 영화, 한 사람의 일대기, 주인공의 좌절과 비애 등, 김영호가 되어 사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주연 영화에서 짧은 시간에 20대에서 40대까지의 변화를 그려내야 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때의 절실함이 이후의 많은 영화들에서도 그 배역의 삶으로 빠져들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님과 함께 한 두 번째 작품인 의 홍종두로 사는 동안, 촬영 중에 영화 스태프들마저 나를 촬영장에서 내쫓을 정도로 홍종두가 되어 살았다.

한 번은 촬영 중에 전 부대원이 서울 모처에서 회식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실제로 공비들이 나타난 줄 알고 식겁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이라는 영화를 촬영할 당시에는 전작인 에서보다 무려 26kg 이상 몸무게를 늘리고, 완전히 일본어로만 연기를 했었다. 스모선수와 레슬링선수들과 실제로 경기를 하면서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촬영장에 숙소를 잡고는 낮이고 밤이고 촬영장 근처를 배회하며 영화 속 배역이 되려고 애쓰며 살았던 시절들이다.

그 시절에는 내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 영화에 미치고 배역에 미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 가족, 친구들은 자연스레 나와 멀어져 버린 것이다. 결국에는 나도 지쳐버렸다. 내 안의 에너지를 모두 써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어느 날, 영화 를 촬영할 때였다.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영화가 흥행되어 천만관객을 동원한다는 것. 그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주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일어난 놀라운 사건임을 깨달은 것이다.

영화에 전념하고 몰입하며 살아온 세월도 어느 덧 20 여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아주 가끔, 초심을 잃고 느슨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어느 사이에 연기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지고 타성에 젖어, 오래 전의 그 열정과 간절함이 퇴색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출연한 영화마다 흥행가도를 달리면서 충무로 최고의 “블루칩”으로 인정받는 배우의 삶을 살았지만, 한 편으로는 늘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과 불편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새롭게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다. 오래 전, 의 김영호처럼, 김영호를 연기했던 그 순수한 열정만 있던 그 시절, 그 열정으로 돌아가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한자리에 안주하다보면 처음 소중했던 마음이 식어가기 마련이다. 책장의 책이나 공원의 간이 의자가 풍파를 견디며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낡고 퇴색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주할 수 없는 것이 또 인생이다.

지금까지 달리고 달려 온 것처럼, 또 다른 정상을 향해서 더욱 열심히 달려보고 싶다. 주저앉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 그리고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영화배우 설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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