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고 지켜서 상속하라 (사53:1~12)
오늘 본문의 말씀인 이사야서 53장 5절, 즉 “예수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사 그를 믿는 죄인들이 영생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며,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는 대속(代贖)의 고난을 예언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신 이유와 예수님이 그런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받는 축복이 무엇인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많은 믿는 자들이 주님의 죽으심을 기리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더욱 경건한 한 주를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런데 더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십자가 형틀을 짊어지고 가고, 더러는 채찍으로 때리고 맞는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 더러는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고난주간 내내 침통한 얼굴로 지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도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자처하신 주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일은 우리가 주님 때문에 고통 받는 것도 아니요, 침통한 얼굴로 지내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아 쟁취하신 자유와 평화와 건강과 부유를 우리가 누리는 것을 보실 때, 고난 받으신 것을 잊고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부모님들은 못 입고, 못 배우고, 잘 먹지도 못하며 자식을 위해 고생하셨습니다. 직장에서, 사업터에서 더러운 꼴도 보고, 못 들을 소리도 들으며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효도한답시고 부모님이 고난 받으셨는데 내가 어찌 편히 지내겠느냐며 자식이 삼시세끼 김치깍두기로만 연명하고, 옷도 다 떨어진 거나 입으며 궁상을 떨고 있으면, 부모님이 “아이고, 내 새끼가 기특도 하지?”그러실까요?
아닙니다. “왜 지지리 궁상을 떨어? 너네 잘 먹이고 많이 가르치고 큰 집에 살게 하려고 내가 고생한 건데 그걸 누려야지, 왜 이렇게 살아?” 이러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동일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잘 살고, 평화롭게 살고, 건강하게 살 때, 당신이 받은 고난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시고 뿌듯해하십니다.
마틴 루터는 수도사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서 다른 수도사들처럼 오랜 기간 동안 금식하고 잠도 자지 않았으며, 또 뼈를 깎는 추위 속에서도 담요를 뒤집어쓰지도 않은 채 밖에서 기도하고, 심지어는 자기 몸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수행하는 수도승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그는 성경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은 명상이나 자해나 순례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더 더욱 면죄부를 통해서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바로 수정하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95개 조문을 발표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총으로(sola gratia),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세 가지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의 연설문을 보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연설문 일부입니다. “저는 언젠가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 위에 이전 노예들의 아들들과 이전 노예 주인의 아들들이 형제애의 한 테이블에 앉아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저의 아들들이 그들의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내면적 인격에 의해 판단되는 나라에 살기를 바랍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 흑인해방과 인권보호를 위해 일하다 결국 흉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바라던 세상이 이루어져 지금은 흑인들이 차별 없는 세상에서 각 분야에 기량을 발휘하며 흑인대통령까지 탄생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천국에서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며, 우리가 건강한 겁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죄가 없으면서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고난 앞에 잠잠하셨던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셨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으로 받은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 후세에 상속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립투사와 애국 열사들이 많은 고난을 겪으며 이 나라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 우리에게 물려줬기에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누리고 사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음으로 주신 이 축복을 누리고 다음 대(代)에, 내 이웃에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해서 이 축복과 은혜를 더 많은 자들이 누릴 수 있도록, 누리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삼성이나 현대가 부친의 수고로 이룬 기업을 받아 누리고 자기 대에 이르러 더욱 왕성하게 발전시켜 나간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제가 한 달에 한 번 꼴로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심으로 주신 축복, 이사야서 53장 5절의 말씀을 상속시키려고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세계를 메주 밟듯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우리 스스로도 이 축복을 누리고 지켜야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신 축복과 은혜를 잊어버리거나 빼앗긴다면 하나님의 나라 입성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시면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5:14)’고 하셨고, 동일하게 요한복음 8장에도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 주님은 죄를 사하여 주시고는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고 하셨습니다. 이 모두 받은 축복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 왕이 넘겨준 나라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술과 향락에 취하여 하나님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거절했으며, 하나님께 반역한 왕이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귀인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거룩한 기명들로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하자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단5). 그래서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받은바 축복과 은혜를 잘 지켜야 함은 물론이고 전파해야 합니다. 여섯 남편을 데리고 살던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 죄에서 자유하게 되자 나가 받은 구원에 대해 전파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8~30).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고난당하심으로 받은 은혜와 축복을 누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나만 누릴 것이 아니라 모든 자가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잘 지켜서 우리 후손에게, 이웃에게 상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뜻이요,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 할렐루야!
옥에서 나와도
생각이 옥에 있는 자는 누굴까?
샘물이 시냇물을 이루고
시냇물이 강물을 이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