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반칙
아들아,
너도 기억할는지 모르겠지만, 작년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남자 허들 110m의 쿠바선수가 1위로 들어오고도 금메달을 박탈당한 일이 있었단다.
왜 그랬는가 하면, 쿠바선수가 아홉 번째와 열 번째 허들을 넘을 때, 바로 옆 레인에 있던 중국선수의 신체를 접촉해 진로를 방해했기 때문이란다. 진로방해는 반칙이거든. 반칙은 반드시 실격되거나 퇴장이거나 벌금을 내거나 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단다. 그래야 원칙을 지키는 자들이 보호되거든.
모든 것에는 원칙이 있지. 그 원칙을 따를 때 모두가 평안하고, 일이 순조롭고, 시비가 그치게 되는 거란다. 파란 신호등이 켜지면 가고, 빨간 신호등이 켜지면 서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사고가 나지 않는 거 아니겠니? 그런데 가끔 파란 불이 미처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성급하게 출발하는 차가 있기 때문에 대형사고가 나고, 사고는 아니더라도 다른 차들이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아찔한 순간이 있는 거다.
원칙, 곧 법 안에 자유가 있는 거란다. 법은 누구를 구속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고 있는 거야. 건물 옥상에 올라가보면 사람들이 떨어질까봐 보호벽을 쳐놓았잖니? 법은 그런 거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반칙을 하며 살지. 되레 반칙하지 않고 원칙대로 살면 우둔한 사람이 되고, 바보 같다고 할 정도로 반칙이 다반사인 세상이지.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원칙대로 살아야 한다. 그게 비록 더디 가는 것 같지만, 오래 갈 수 있는 방법이거든.
아들아,
하나님은 원칙주의자시란다. 그 분은 스스로 법을 만드시고, 그 법을 지키시는 분이지. 그 분은 반칙하는 자, 더는 교묘하게 변칙을 쓰는 자를 징계하시지. 하나님이 얼마나 철저한 원칙주의자인지는 역대상 13장을 보면 알 수 있단다. 다윗이 아비나답 집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나오려고 소가 끄는 수레에 실었단다. 사실 법궤는 레위인이 들어서 운반해야 하는데 변칙을 쓴 거지.
그런데 갑자기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니까 옆에 있던 웃사라는 사람이 그만 그 법궤를 잡았지 뭐냐. 사람에겐 반사 신경이란 것이 있잖니? 귀한 것이 떨어지니까 자기도 모르게 잡았던 거야.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법궤에 손을 댄 웃사를 죽이셨단다. 제사장 외에는 법궤에 손을 댈 수 없는 원칙을 위배했기 때문이지. 웃사가 아니었어도 누구든 그런 상황이라면 웃사처럼 행동했을 거다.
그러나 그것이 반사적이었든 좋은 의도였든 반칙은 반칙이기에 아웃된 거란다. 이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신 하나님은 신앙에 있어서도 원칙을 강조하신단다.
마태복음 7장 22절 이하에 보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고, 아무리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한다고 해도 불법을 행한 자들은 그 날 하나님이 도무지 모른다 하신다고 쓰여 있단다. 신앙도 법 안에서 하라는 것이지. 반칙은 불법이고, 불법은 곧 죄이기 때문이지.
살다보면 반칙하고 싶을 때가 있단다. 많은 사람이 반칙하며 승승장구할 때 더욱 그렇지. 또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지. 그러나 법 위에 잠을 자다가는 법에서 떨어지게 되고, 아웃되는 수가 있으니 우리 원칙대로 살자꾸나.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