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 같은 복을 받아라 (대상4:9~10)
2012년, New Start, 새로운 출발을 결심한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길 바라며, 야베스와 같은 복이 임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야베스가 받은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야베스가 왜 그러한 축복을 받았는지 살펴볼까요?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4:10). 이것이 야베스의 기도 전문입니다. 이것은 단 한 문장으로 된 아주 간결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왜 이 기도가 유명하고, 이 기도에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다 주셨는가 하면, 그것은 야베스의 기도가 지극히 겸손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는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였고,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는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라는 뜻으로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습니다(대상4:9). 그런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었나 봅니다. 기도를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원컨대’, 이는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거든’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경건함이 서려 있으며, 겸손한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편 10장 17절의 말씀, 곧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의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에 입각하여 그의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야베스의 이 겸손한 마음을 마태복음 5장 5절의 말씀과 접목시켜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겸손하다, 온순하다’는 것은 바로 ‘온유’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 있는 말씀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상속자가 된다’, ‘할당된 부분을 받다’는 뜻입니다. 즉 상속자로서 할당된 부분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천국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축복을 말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삶은 이 땅에서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은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하여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둘째, 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축복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온유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여러분, 사실 온유하면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러나 길게 보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솝우화에 바람과 태양이 나그네의 옷을 누가 벗기나 시합한 이야기 아시죠? 누가 이깁니까? 칼바람이 이겼습니까? 아닙니다. 따스한 태양이 이겼습니다.
온유는 따스할 온(溫)에 부드러울 유(柔)입니다. 결국엔 온유한 자가 세상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로마 병정들에게 붙잡혀 가면서도 양처럼 온순하셨습니다. 침을 뱉고, 때리는 자에게 도전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사53:7).
그래서 그 분이 그들에게 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인류 앞에 다시 서셨습니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으면, 싸우지 않고 우물을 그냥 넘겨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축복을 받았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거부가 되었고, 마침내는 아비멜렉이 화친을 청해오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저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자주 보는데, 그걸 보면 사나운 동물들은 그들의 지경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되레 순한 동물들의 영역이 더 넓은 걸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힘이 부쳐서 사자나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긴 하지만, 그들이 차지하는 땅이 더 넓고, 종족도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37:9~11).
저는 이 ‘온유’라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제가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운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서, 또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실질적으로 헬라적인 ‘온유’의 뜻은 사나운 짐승이 잘 훈련되어지고 길들여져서 다루기 쉬운 짐승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를 보세요. 모세가 처음부터 온유한 자였습니까? No. 그는 쉽게 분노하는 타입이었습니다. 그래서 살인자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도하심을 따라 살더니 천하에 온유한 자가 되었고, 그에게 하나님은 너른 지경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는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그는 절대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바울은 정말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온유한 마음은 온유하신, 온유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본성이 사랑이며,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돌아가신 제 부친은 비록 예수는 믿지 않으셨지만 정말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의 성함이 어질 인(仁)에 복 복(福)이어서 그러셨는지, 방배동 일대에서 그의 온유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방배동 일대에서 우리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 분은 땅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와는 전혀 딴판으로 총 나간다, 칼 나간다 할 정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70년대 초에는 욱하는 성질에 경찰을 팬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 없지요. 그런 제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길들여지고 다스려지니 이제는 온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전의 저를 알던 사람들은 딴 사람이 되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사실 처음 목회를 할 때, 저를 비판하고 모함하던 사람에 대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갖다 놔라’ 합니다. 그랬더니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전 세계를 맡겨주시더란 말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이 제게 이루어지더란 말입니다.
온유는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갈5:23).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외적으로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변해야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온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화나 버럭 내는 남자와 연애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도 주먹부터 날아오는 주인 밑에서 누가 일하겠습니까? 바가지 박박 긁는 아내라면 집에 들어가고 싶겠습니까?
호통이나 치고, 분노하는 목자라면 왜 따라갑니까? 따스한 사람과 연애하고, 사업하고, 동업하고, 그런 목사를 따라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그런 자가 됩시다. 성경에는 분노하는 자와 동행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왜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까? 바로 분노 때문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엄히 말씀하십니다.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34:15).
얼마 전에 혈기 내다가 쓰러진 사람을 봤습니다. 누구나 혈기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수위를 높인다면 내 인생의 배는 모든 것을 침몰시키는 분노라는 암초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온유한 자가 됩시다. 그래서 야베스와 같은 복을 받읍시다. 할렐루야!
장작 패는 곳에 가면 눈이 빠지고
떡 치는 곳에 가면 떡 얻어 먹는다
골짜기의 물이 낮은 곳에 모이듯
하나님의 은혜도 낮은 곳에 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