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라 (말1:1~14)
몇 년 전 뇌출혈 때문에 제가 실명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맞을 짓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 집회 중이었는데, 어느 목사가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예배시간을 잡아 놓고는 무조건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여러 가지 일이 많아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던 터라 저는 상의도 없이 예배를 잡아놓은 그 목사에게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광고도 나갔다는데…. 그래서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가서 대충 예배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바로 그 날 밤에 뇌출혈이 일어났습니다. 예배를 대충 드린 대가였습니다. 눈의 혈관이 터져서 한 쪽 눈이 전혀 안 보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한 명이 있든 열 명이 있든, 천 명, 만 명이 있든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예배에 임합니다.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의 낯을 뵙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충이 말이 됩니까? 그 분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물과 만인을 지으신 창조주요 주관자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 대충, 대강이라니요.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왕을 만나러 간다고 칩시다. 그러면 대충 옷 입고 갑니까?
천만의 말씀일 겁니다. 땡빚을 내서라도 한 벌 쫙 뽑아 입고 갈 겁니다. 또 왕을 만나러 가는데 20분쯤 늦게 갑니까? 그건 용납도 안 되겠지만, 당신 스스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가다가 차 막히면 늦을까봐 아마도 한 시간쯤 일찍 출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 빈손으로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왕에게 드릴 귀한 선물을 정성껏 준비할 게 분명합니다. 자기의 분에 넘치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그 분이 좋아하실까 걱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어떻습니까? 입던 옷 대충 입고 느지막이 교회에 나오지요? 그리고 꾸벅꾸벅 졸다가 헌금 시간에 헌금 바구니가 돌아오면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하나 꺼내 동냥하듯 집어놓고 다리 꼬고 앉았지요? 그리고 축도하면 나가버리지요? 그러고도 당신은 예배 드렸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 예배를 안 받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왔다 갔는지 모르지만, 와서 목사에게 눈도장을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절대 당신의 예배를 가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에 허기지신 분이 아닙니다.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대강, 대충 드리는 그런 예배를 흠향하시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돈이 궁해서 당신이 동냥하듯 던진 돈에 감지덕지 할 줄 압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하나님처럼 대접해야 옳은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왕보다 못해서야,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는 것이 결혼식 가는 것보다 못해서야 말이 됩니까? 그러고도 하나님께 복 달라고 합니까? 그러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합니까? No.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말1:9).
유명한 일화지요. 주기철 목사와 그의 스승인 조만식 선생의 이야기 말입니다. 어느 주일, 조만식 장로가 시급한 국사(國事)로 손님을 만나다 예배 시간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조만식 장로가 예배당에 도착하여 막 신발장에 신발을 넣으려고 하는 순간, 주기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 조만식 장로는 신발을 든 채 그 자리에 섰습니다. 그 상태로 설교가 끝나고 주기철 목사님은 “장로님, 기도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신발을 든 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사람 만나느라 하나님 전에 늦게 왔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용서해주시고, 주의 종에게 심려를 끼친 것을 용서해주시고, 장로로서 성도들에게 본이 되지 못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조만식 장로가 매주일 예배에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 한 번 늦은 겁니다. 조만식 장로 같은 분이 늦을 때에야 얼마나 황급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예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이 갈수록 제사 드리는 것을 번폐스럽게 생각하고, 또 도적질한 물건이나 저는 것, 병든 것을 헌물로 드리는 등, 하나님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말1:13). 팔아먹지 못할 것, 상품가치가 없는 것들만 골라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지만 돌이키지 않자 말라기 선지자 후로 40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에 침묵하셨습니다.
이를 우리에게 적용해볼까요? 헌금할 때 큰돈이 잡히면 밀어놓고 잔돈으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경건한 체 한다는 것입니다. 놀 것 다 놀고, 잘 것 다 자고 예배시간 10분, 20분 늦는 것은 예사로 안다는 것입니다. ‘번폐스럽다’는 말은 귀찮다는 뜻입니다. “아이고, 왜 이렇게 주일은 빨리 오나? 귀찮아죽겠다.”, “주일 다녀왔으면 됐지, 무슨 수요예배야? 철야예배는 왜 나오래? 귀찮아죽겠네.” 이런 겁니다.
그런 자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귀찮아죽겠다고? 그럼 오지 마.”라고 하십니다. 제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그래도 못 깨달으면 어떻게 하시냐? 당신에게도 침묵하실 것입니다. 침묵이 뭡니까?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볼까요?
잠언 말씀입니다.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잠1:26~30).
여러분, 예배의 성공이 모든 것의 성공입니다. 가인은 예배를 잘못 드려 저주를 받았고, 아벨은 예배를 잘 드려 복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제사를 잘못 드리다가 망했고, 다윗은 정성으로 드리다가 복을 받았습니다. 솔로몬이 받은 지혜와 부와 명예와 장수, 이것은 예배를 잘 드렸기 때문에 받은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아들들 어릴 때의 일이 생각나네요. 제가 ‘예수님 찬양’할 때, 손을 돌리며 춤을 추지 않습니까? 그게 우리 아들이 보기에 좀 그랬나 봅니다. 어느 날 제게 그러더라고요. “아버지, 제발 찬양할 때 춤 좀 추지 마세요. 친구들한테 창피해 죽겠어요.” 그래서 제가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아빠가 찬양하면서 춤추는 것은 너 보라고 하는 게 아니야. 하나님 보시라고 최선을 다하는 거야.” 다윗이 법궤가 돌아오자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춤을 췄습니다. 그걸 본 그의 아내 미갈이 체통 운운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삼하6:21).
찬양을 해도 마음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남이 하니까 그냥 부르면 안 됩니다. 봉사를 해도 누가 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니 열심히 해야 합니다. 직분을 맡게 되면 더욱 그래야 합니다. 장로입네, 권사입네, 전도사네, 목사네 하고 머리만 뻣뻣해서 돌아다니면 나중에 하나님께 크게 야단맞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합시다.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뵙는데 소홀하시겠습니까? 늦게 가시겠습니까? 대충 차려입고 가시겠습니까?
할렐루야!
대접을 받고자 하는가
그러면 먼저 대접하라
협박은 죽이려는 것이 목적이지만
경고는 살리기 위한 사랑의 메시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