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마6:9~15)
1992년, 잠실 메인스타디움 집회 때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메인스타디움 집회를 위해 청계산으로 기도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있던 바로 전날, 성령께서 제게 분명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과 화친하라. 용서할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고, 용서받을 일이 있으면 용서를 받아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나는 대로 모든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용서를 빌었고, 제 마음에 꺼려지는 일은 다 용서했습니다. 또 모든 지교회 목회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메인스타디움 집회에 함께 하셔서 쏟아지는 비를 멈추고 아름다운 햇빛으로 비춰주셨고, 그 날 성령의 대역사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만일 제가 성령의 음성을 무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비 때문에 집회가 무산되었을지 모릅니다.
건물을 지을 때라든지, 한 도시를 건설함에 있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터를 닦고, 길을 내는 일입니다. 저는 이 용서가 터를 닦고, 길을 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축복이라는 집을 짓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도달하기 위해 길을 내는 작업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모범지,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6:9~13). 그런데 주기도문 바로 뒷 구절인 14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기도문의 가장 핵심이 바로 12절, 곧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14절은 주기도문을 요약해주신 셈입니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쳐주신 것입니다.
사실 주기도문의 대부분은 우리의 간구에 대해 하나님이 하실 일들입니다. 그러나 12절만은 꼭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뭐냐?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와 과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의 죄도 용서하시고, 허물도 덮으시고 우리의 소원과 간구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까? 작정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조용하십니까?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귀가 멀어서요? 하나님이 어디 외출 나가셔서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 이웃의 죄를, 내 가족의 허물을, 내 교회 성도들의 과실을 용서하는 일말입니다.
이사야서 58장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어주는 것입니다.
즉 내가 묶고 있던 결박을 풀어주고, 내가 누르던 압제를 풀어 자유케 하고, 내가 씌운 멍에를 꺾어주고 와서 금식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서 나에게 아침 같이 빛을 비췰 것이며, 나의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나의 의가 내 앞에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내 뒤에 호위할 것이며, 내가 부를 때에는 하나님이 응답하겠고 내가 부르짖을 때에는 하나님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정리하면 내가 내 이웃과 가족을 용서하고 금식기도하면, 하나님이 속히 응답하시고, 치료하시고, 형통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왜 지금까지 며칠씩 굶어가며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는지 아시겠지요?
저도 아들 둘을 키우지만, 두 녀석이 서로 으르렁대는 꼴은 못 보겠습니다. 피차 싸울 수는 있겠지만, 바로 용서하고 화해하면 아비 된 입장에서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동일하십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용서하지 못하고 서로 웬수로 산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보면 충분히 용서할 일을 두고 ‘법대로 하자’고 덤비는 경우를 봅니다.
그럼 법대로 한 번 해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대로 하셨다면,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고, 천국을 운운할 수 있었겠습니까? 죄인 중의 괴수인 우리를 용서하신 엄청난 사랑을 입었는데, 형제간에 원수질 일을 얼마나 했다고 용서를 못한답니까? 그런 자에게 주님은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입니다. 어떤 임금이 10억 빚진 자를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가서 자기에게 10만원 빚진 자를 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임금이 알고는 노발대발하여 그 사람을 옥에 처넣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는 물론이고 원수까지 용서해야 합니다. 왜? 내가 용서받아야 하니까. 왜?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가 없으니까. 결론적으로 내가 살기 위해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 초기에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고 있었는데, 정신이상증세가 있는 한 자매가 안수를 받으러 왔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는 사람으로부터 겁탈을 당한 충격으로 인해 그리된 것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연거푸 “절대 용서 못합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해야 네가 산다. 용서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용서해라.”고 권면했지만, 그 자매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할 수 없다고 이를 갈았습니다.
한 두 시간쯤 그 자매와 씨름한 것 같습니다. 저는 용서하라고 하고, 그 자매는 못한다고 하고. 한참 후에야 그 자매는 참았던 눈물을 쏟으면서 “그 사람을 용서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제 품 안에서 한참동안을 펑펑 울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매에게서 귀신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니 거짓말처럼 정신이 온전해졌습니다. 후에 그 자매는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이렇듯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며, 나 자신을 위한 사랑입니다.
실제 세계 암 과학자 단체인 소사이어티는 가장 큰 발병 원인은 정신적, 심리적 요인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 가운데 스트레스는 호르몬의 불균형을 일으켜 우리 몸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또한 마음에 증오심, 공포심이 생기면, 우리 몸의 면역 능력과 효소 체계 기능이 떨어지며, 면역능력과 호르몬 체계에 혼란을 일으켜 우울증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또 울화증은 우리 몸의 생체 리듬을 파괴시키고, 우리 몸 안에 화학작용을 일으켜 돌연변이적인 병을 일으킨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마음에 사랑이 넘치고 영성이 높으면, 신체의 면역력이 높아지고 효소 작용과 호르몬 신호 체계가 정상화 된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래도 용서를 미루겠습니까?
“매일 보는 성도가 그럴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이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시는 분들! 여러분, 가까우니까 과실도 하고, 죄도 짓는 겁니다. 멀리 있다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가까운 북한이기에, 가까운 일본과 중국이기에 이해관계가 복잡한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 말대로 가까운데 용서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복음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복음은 용서가 전제된 것입니다. 죄 많은 우리를 예수님이 용서하신 것에서부터 복음이 시작되고, 용서에서 사랑의 샘이 터져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통 +신통=만사형통’입니다. 사람과 화친하며 하나님과 화친하면 삶에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는 길에는 예수님의 용서가 전제되었듯이, 사람과의 화통을 위해서는 우리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 이웃을, 가족을 용서합시다. 주님처럼, 스데반처럼.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3~14). 할렐루야!
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용서하는 것은 신성한 것이다
‘인통(人通) + 신통(神通) = 만사형통’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용서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