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쓰는 사람과 성공한 사람의 공통점 (히10:38~39)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하나의 예를 먼저 들자면, 그들은 모두 상대를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려 하나님을 깜짝 놀라게 했고, 입다는 서원한대로 딸을 죽여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하자 예수님이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요, 시간 낭비요, 돈 낭비입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그런데 당신은 지금 어떻습니까? 마치 코뚜레에 꿰여 끌려온 소처럼 억지로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느지막이 와서 시간이나 때우고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예배에 하나님이 감동하시겠습니까? 천천만만입니다. 하나님도 감성이 있으신 분입니다. 하나님도 좋은 것이 있고, 싫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미워했고, 야곱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흉내만 낸다면 그 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군(主君)과 약속을 해놓고 늦장을 부린다면, 그 앞에서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다면 목숨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군이십니다. 고로 그 분 앞에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군이 주시는 기쁨으로 우리가 기적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할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 설교라 생각하고 합니다. 찬송을 불러도 진정을 다해 부릅니다. 왜냐?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요.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하나님이 천국열쇠를 제게 맡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감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성공한 사람들도 다 상대를 감동시킨 자들입니다. 기업이 고객을 만족시키면 어느 정도의 성장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단언컨데 온리 원(Only One)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고객이 뭉클할 정도로 감동을 시켜야 합니다. 질로, 서비스로, 디자인으로 말입니다.
영화배우가 아무리 뛰어난 미모를 가졌어도 그의 연기가 관객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그의 명성은 그리 길지 못할 것입니다. 동일합니다. 백성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정치, 단체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경영, 학생과 학부모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교육, 성도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목회, 관객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연극, 영화, 노래는 다 낭비일 뿐입니다.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아내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남편, 반대로 남편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아내, 부모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자식, 자식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부모, 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늘 자신 안에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쓴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의 또 하나는 바로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용두사미(龍頭蛇尾)나, 작심삼일(作心三日)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많은 믿음의 선친들이 다 그런 자들입니다. 그들은 처음과 끝이 동일한 열정과 열심을 지닌 자라는 것과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초지일관(初志一貫)하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계22:13)은 처음과 끝이 동일한 자를 원하시고, 매사 시작했으면 반드시 끝장을 보고 마는 자를 찾아 쓰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예수님이 왜 시몬을 제자로 택하셨는지 나와 있습니다. 시몬이라 하는 자는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고 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잡힐 때까지 밤새도록 그물질을 한 사람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만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울이던 시절에 예수의 도를 좇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까지 쫓아갔던 자입니다. 다메섹은 굉장히 먼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거기까지 가서 잡아냈습니다. 그런 성격을 하나님이 보시고 그를 사도로 택하신 것입니다(행9).
여호수아도 인내하며 끝장을 본 사람입니다. 사실 여리고를 돌아서 무너뜨린다는 것은 사람의 상식으로는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진행하는 지도자로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그리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며 끝까지 7일 동안 여리고를 일곱 바퀴 돌아 마침내 여리고를 무너뜨렸습니다(수6:1~21). 여호수아서 6장 마지막 절에는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고 했는데, 명성은 인내와 끈기를 가진 자의 몫임을 말해줍니다.
야곱도 얍복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더불어 씨름을 하다 환도뼈가 위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축복할 때까지 말입니다. 날이 밝아오자 하나님의 사자가 결국 야곱을 축복하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끝장을 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져주시고 소망하는 것을 만족케 하십니다(창32:22~30).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하여 3년 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 문을 열었고(왕상18:19~46), 엘리야를 좇던 엘리사는 엘리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끝까지 좇더니 그보다 갑절의 영감을 얻었습니다(왕하2:1~14).
소경 바디매오도 그랬습니다. 그는 눈뜨기를 소원했고, 그 소원을 이루기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지 귀를 막고 포기하지 않더니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 소원을 이뤘습니다(막10:46~52).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친구에게 떡을 구하는 자나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재판관을 찾아간 과부의 이야기는 인내와 끈기만이 성공에 이르는 길임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친구라서 떡을 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귀찮아서, 안 주면 안 갈 것 같으니까 준다고 했습니다.
재판장도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눅18:5)고 생각하여 그의 소원을 들어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7~8).
즉 너희가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구하다 말기 때문에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는 것에 대하여 오래 참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가 달라져도, 세상이 핍박해도 내가 믿는 것에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면서 2천 번 실패했지만, 끝까지 연구하여 마침내 그것을 발명해냈고, 링컨도 많은 실패를 인내하여 마침내 미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까지 어찌 해야 하는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는 것입니다. 넘어갈 때까지 찍으라는 것입니다.
포기의 뜻이 뭔 줄 압니까? 포기(抛棄)란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권투를 하다가 흰 수건을 던지면 지는 것 아닙니까? 인생을, 목적한 바를 던져버리는 것이 포기입니다. 그래서 포기는 자살 행위라는 것입니다.
나는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쓰는 자와 성공한 자들이 어떻게 했는지 배웠을 것입니다. 모방은 제2의 창조입니다. 우리도 그들을 모방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고, 성공자의 반열에도 들어갑시다. 할렐루야!
시작은 누구나 함께 할 수 있지만
마지막은 누구나 함께 할 수 없다
상대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시간낭비요 에너지낭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