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라 (고후6:1~13)
사람 인(人)은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을 본떠 만든 글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절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신 후에 그에게 아내 하와를 주심으로 ‘우리(We)’라는 공동체를 형성해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혼자 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에도 노아와 그의 가족을 방주로 구원하사 역시 ‘우리’를 깨뜨리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We)가 무엇입니까? 나와 가족이 합하여 우리요, 나와 이웃이 연합될 때 우리요, 나와 사회가, 나와 국가가 하나 될 때 우리며, 더 나아가 나와 세계가 연계되어 우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살면서 각자가 나만 생각한다면 가정이, 이웃이, 교회가, 단체가, 국가가, 세계가 과연 어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보나마나 뻔합니다. 분열이요, 분쟁일 것입니다.
요즘 다들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우리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일자리 나누기 운동’입니다. 불경기로 인해 기업마다 인원감축을 단행하고 있는데, 일자리를 나눔으로 내 동료가 직장에서 퇴출되지 않게 하는 운동이 극심한 경제 불황 중에도 우리를 살맛나게 합니다.
물론 이런 일들을 위해서는 희생이 따르지요. 내 임금이 다른 동료로 인해 반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줄어드니까요. 하지만 나의 자그마한 희생이 다른 가정을 살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아름다움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 본(本)을 보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만일 그 분이 당신만을 생각하셨다면 어찌 그 쓰디 쓴 잔을 마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괜찮았을 것 같습니까?
아니요, 그 분은 인자(人子)로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셨기에 모든 피와 물을 쏟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일이 절대 쉽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나’만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셔서 당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또한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있었기에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낸 것입니다.
이 나라의 독립이 거저 주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을 버리고 이 나라를 택한 독립투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저 이스라엘 땅에서 이 나라까지 복음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죽음을 불사한 믿음의 선친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닙니까?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자는 아직 소아적 인격자요, 어린 신앙을 소유한 자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모두 ‘내 거’, ‘나 먼저’를 외칩니다. 그러나 장성했다면 나보다 우리를 생각해야 옳습니다. 나를 희생해서 우리를 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작대기가 힘들다고 빠져버리면 지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땅에 흩어지고 깨져버릴 겁니다. 작대기가 희생할 때 지게 안의 것들이 보존되듯, 내가 희생하면 내 가정이 살고, 내 사회가 살고, 내 교회가 살고, 내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말합니다. 세계 선교할 돈으로 서울 본부교회나 지으라고. 예, 저도 서울교회 짓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 교회만 생각했다면 벌써 열 번은 지었을 겁니다. 그러나 더 큰 우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 복음을 접하지 않은 영혼들이 널려 있는데, 벼랑을 향하여 가고 있는 영혼들이 많은데, 어떻게 내 교회만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힘들어 하는 것 압니다. 체육관 의자가 불편한 것도 다 압니다. 허나 조금 우리가 희생하면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기를 늦추는 것입니다.
또 우리를 생각하게 되면 포기란 없습니다. 그러나 나만을 생각하는 자는 포기가 빠르지요. 왜요? 내게 유익이 없으면 바로 손 놓고 돌아서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처럼요. 그러나 우리를 생각하면 포기대신 오래 생각하고, 오래 견디게 됩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그러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당신의 안일만을 생각했다면 직장에서 더러운 꼴을 당했을 때 바로 사표 던지고 나올 수 있는 일을, 가족을 생각해서 꾹 참는 것 아니겠습니까? 많은 믿음의 선친들이 예수그리스도처럼 핍박 앞에서, 굴욕과 헐벗고 배고픔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들고 달린 까닭 역시 우리를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벧후 3:15).
저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개미와 같은 인생을 살기 원치 않습니다. 개미의 부지런함은 자신의 배만 불리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꿀벌과 같은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이 꽃과 저 꽃의 꽃가루를 날라다주는 수분매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꿀벌, 수고로 모은 꿀을 사람에게 주는 꿀벌의 인생은 더불어 사는 삶을 교훈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삭막해졌는지 압니까? ‘나’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있는지 압니까? 왜 이렇게 질서와 공중도덕이 상실되고 있는지 압니까? 역시 ‘나’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정치판이 맨날 그 타령인 줄 압니까? ‘내 당’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꿉니다. 그러나 아무도 한 알의 씨앗이 되기는 싫어합니다. 씨앗이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절대 아름다운 나무도, 꽃도, 열매도 거둘 수 없을 겁니다. 씨앗의 희생이 있기에 푸른 세상이 있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한 알의 씨앗이 되면 어떨까요? 절대 당신에게 대단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희생하고, 조금 양보하고, 조금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 내가 조금 희생하면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있고, 교회 내에서 내가 조금 양보하면 절대 싸움이 나지 않으며, 사회 안에서 내가 조금 배려하면 모두 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없는 나는 있을 수 없고, 사회가 없는 나는 무익하며, 국가 없는 나는 개만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We)는 자동차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는 핸들이고, 어떤 나는 타이어이고, 또 어떤 나는 백미러요, 다른 어떤 나는 자동차 문입니다. 그런데 각자의 ‘나’가 나만을 생각한다면 그 자동차는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사고만 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것들이 연합하고 융화될 때 자동차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동일합니다. 가족이, 교회가, 사회가, 국가가, 세계가 하나 되고, 서로를 배려할 때 다툼이 사라질 것이고, 평화와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원하십니까? 내가 먼저 희생하면 됩니다. 교회가 하나 되길 원합니까? 내가 죽으면 됩니다. 국가의 단결을 원합니까? 우리를 먼저 생각하면 됩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삶을 버리고, 우리를 생각하는 삶을 살 때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고, 우리 안에서 사는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폭을 넓힐 때 나 외의 사람들이 보이게 되고, 남을 포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넓힙시다. 나만을 생각하는 삶에서 우리를 생각하는 삶을 사는 장성한 자가 됩시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말입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6:11~13). 할렐루야!
나만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배신하고 만다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