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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 고전12:12~31 )

374호 · 2007-04-25

당신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당신은 왜 그토록 열심히 돈을 벌고 있습니까?”, “당신은 왜 눈이 짓무르도록 공부를 합니까?”, “당신은 왜 새벽에 일어나 조깅을 합니까?” 대답해보십시오.

제 질문에 당신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 자식들이 하고 싶다는 것 다 해주려고요.”,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겁니다.”, “하나님도 건강이 제일이라고 하셨잖아요. 건강하려고 운동하는 거죠.”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이 말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볼까요? 그것은 “행복하기 위해서요.” 입니다.

당신은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벌고, 행복해지기 위해 공부를 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건강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추구’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놀러가지 않고 주의 전에 나와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 그리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절제된 삶을 사는 것 역시 결국 행복을 위해서 입니다. 영원한 행복, 최고의 행복을 지향하기 위해서 주 안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 영원히 사는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지면서 하나 깨달은 것이 있는데, 이 세상의 행복은 부유순도, 명예순도 아니요 더욱이 성적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금에 일어난 미국 버지니아 공과대학의 총기난동사건을 보고 저는 생각이 깊었습니다. 타국으로 이주하여 세탁소를 하는 부모는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많은 월급을 받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자녀들은 머리가 명석하여 미국인들도 가기 힘든 명문대에 척척 들어갔으니 행복은 보장된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그렇게 믿었던 자식이 자신의 대학 캠퍼스에 총을 무차별 난사하여 32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습니다. 저는 과연 조승희라는 학생은 ‘그가 원하는 삶을 살았을까’, ‘그는 과연 명문대에 다니면서 행복했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왕따였고, 늘 혼자였으며 학과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봐서 그는 절대 행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엄청난 결과가 그것을 사실로 입증해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 날을 위해 오늘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영원한 나라와 영생을 얻기 위해, 그 날의 영광을 얻기 위해 이 땅에서 고난을 받고, 좁은 길로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옳고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행복은 현재에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잔칫날 먹자고 사흘 굶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중에 잘 먹자고 사흘 굶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우리 세대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어색할 정도로 밥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형편이 어려워 다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더욱 클 수 있습니다. “너는 꼭 의사가 되어야 해. 뭐니 뭐니 해도 의사가 어디가나 대접받지.”, “너는 꼭 박사가 되라. 박사하면 사람들이 다시 보더라.” 물론 우리 부모들이 자녀 잘 되면 덕 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네들 잘 되서 행복하라고 한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다 밀어줄께.” 하면서요. 그러나 사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밀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지로 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들이 원치 않는 곳으로, 원치 않는 미래로 말입니다.

조승희 학생이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행복한 일을 찾아했더라면 이 같은 참변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사려 됩니다.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해치거나 악을 꾀하는 일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대개 자기가 가진 달란트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요리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군인이 좋고, 어떤 사람은 남들 싫다는 공부가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신바람이 나고 인생이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 그리는 것은 화쟁이라고 하며 ‘공부하라’고 한다면, 남자가 무슨 요리냐며 검은 가운 입는 검사가 되라고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자녀의 삶을 불행으로 모는 겁니다.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저는 우리 두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기도했고, 그렇게 강요했습니다. 그런데 애들은 한사코 안하겠다는 겁니다. 사업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단도 쳐보고 윽박질러도 봤지만 목사는 자기가 갈 길이 아니라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목사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명과 사명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아비의 욕심으로 그리 강요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자질로 본다면야 제가 세상에 있을 때 사업가 아니었습니까. 피는 못 속인다고 그들도 사업가 기질이 있는 게죠. 그래서 더 이상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데 막을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다양한 성격, 다양한 달란트, 다양한 외모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다들 의사로 만든다면, 다들 변호사, 판사가 된다면 물건은 누가 팔고, 거리는 누가 치우고, 교통질서는 누가 잡는단 말입니까. 행복은 절대 부귀와 명예에 있지 않습니다. 평생 맞지 않는 직업으로 살아야 한다면 당신은 얼마나 삶이 고되고 무겁겠습니까? 당신의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공감하실 수 없다면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동네 한 바퀴 돌아보십시오. 보나마나 발이 다 부르틀 것입니다. 맞지 않는 직업, 일이 그런 겁니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을 시킵시다. 그 길로 밀어줍시다.

그리고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대화할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독백은 외로운 겁니다.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말에 응수해 줄 때 사람은 행복하고, 문제해결을 맛볼 수 있습니다. 조승희 학생의 부모가 아들과 자주 대화했더라면 아들 속내를 알았을 것이고, 이런 무시무시한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도 피해자 입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그에게도 조화를 바치는 겁니다.

우리가 속이 안 좋을 때 토하거나 화장실에 가서 설사하면 시원해지지 않습니까.

대화가 이런 것입니다. 다들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일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다 털어놓고 나면 속이 많이 시원해지는 것을요.

요즘은 말은 많은데 대화는 단절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 내에서도,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단절로 인하여 오해가 쌓이고, 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TV 볼 시간은 있고, 신문은 다 읽으면서 아내와 자녀와 부모와 대화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다 핑계입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당신이 TV앞에 앉아 있는 동안 당신의 아내와 자녀, 부모의 속은 썩어가고 있으며, 그것이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폭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일랑 말고 지금 대화를 시작하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대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기도만 하고 벌떡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래야 우리 인생에 해답과 정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행복하기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자기 것을 찾아서 기쁨으로 일하고, 집에 와서는 식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어서 화목을 도모하세요. 대궐 같은 집에 사는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큰 차를 타야 행복한 것도 아니고, 진수성찬으로 상이 휘어져야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됨을 잊지 마세요. 할렐루야!

명의는 오랜 진맥 후에 일침으로 치료한다

사과나무에 사과 열리고 감나무에 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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