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사랑을 어찌 다 측량하랴! (삼하 18:1~33)
올해 교단차원의 목표는 ‘일생일대 최고의 복을 받자’이지만, 제 개인적인 목표는 어머니께 더욱 효도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고, 어머니가 원하시는 것을 해드리고, 어머니를 멋있게 가꿔드리고픈 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제 어머니는 한동안 저로 인해 심한 가슴앓이를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 때문에 생긴 갈등이 원인이었지만 어머니가 저로 인하여 마음고생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 동생인 이시대 목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어머니와 제가 아직 화해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번은 어머니께서 약주를 조금 하시고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를 내어 우시더랍니다. 놀란 이시대 목사가 “어머니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했더니 어머니께서 이시대 목사에게 “오늘이 네 형 생일인데, 내가 네 형을 안 본다고 너까지 형을 모른 체 하냐?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느냐?”며 우시더랍니다. 이시대 목사는 어머니가 형을 미워하고 있는 줄만 알고 있었지 그렇게까지 가슴에 품고 사시는지 몰랐다며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고 합니다.
‘제 자식 낳아봐야 부모 마음 안다’고 합니다. 저도 자식을 낳고 보니 이게 애물단지라는 말이 딱 맞는 겁니다. ‘애물단지’는 ‘애물(愛物)’의 낮춘 말로, 가장 사랑하고 아끼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줘도 줘도 더 주고 싶고, 살피고 살펴도 모자란 것이 자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더니 그 말이 옳은가 봅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은 그만 못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요즘은 효(孝)라는 말자체가 자취를 감추고 있고, 효에 대한 개념조차 바뀌고 있습니다. 한 방송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커서 부모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겠느냐?’고 질문했더니 대다수의 아이들이 ‘시설 좋은 양로원에 보내드릴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사람의 기본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도리요,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요즘 어떻습니까? 파고다 공원에 추우나 더우나 앉아 있는 노인들, 집 안에 갇혀 사는 노인들, 자식들의 학대에 자살하는 노인들이 늘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 최고의 학구열, IT 분야에 최강국이면 뭐 합니까? 제 부모를 내다 버리는 몰상식한 자식이 있는 나라인데 말입니다. 부모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 부모를 업고 다니지는 못할망정 학대하고 길로 내쫓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자식에게 버림 받아 갈 곳이 없어 보호시설에 간 부모는 그래도 그게 자식이라고 절대 자식의 주소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지 않습니까? 자식이 자기로 인해 못들을 소리 들을까봐서요.
성경에도 이런 불초(不肖)의 자식까지 사랑하는 부모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에게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누이동생 다말의 일로 이복형 암논을 죽이고, 그 후 3년간 어머니의 향리 그술에 도피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압의 중재로 예루살렘에 귀환이 허용되었으나 왕위를 노려 아비인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피신하였고 결국 압살롬의 군대와 다윗의 군대가 싸우게 됩니다.
싸움터로 나가는 신복들에게 다윗은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합니다. 죽이지는 말라는 다윗의 당부였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상수리나무에 걸린 압살롬을 죽이고 맙니다. 아들의 소식을 들은 다윗은 슬픔에 잠겨 울며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했습니다. 나중 다윗이 솔로몬에게 왕위를 계승할 때 ‘요압을 처단하라’ 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아브넬과 아마사의 억울한 피를 갚아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압살롬을 죽인 대가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미루어 생각합니다.
한 남자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이 남자의 청혼을 계속 거절했습니다. 남자는 여인에 가서 “내가 어떻게 해야 결혼해 줄 겁니까?” 물었습니다. 여인은 그 남자와 결혼하기 싫어서 절대 요구할 수 없는 요구를 합니다. “당신의 어머니 심장을 가지고 오면 결혼해 주겠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그날 밤, 잠든 어머니를 죽이고 심장을 꺼내 여인에게 달려가다 그만 넘어졌습니다. 그 때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들아, 괜찮니?” 그것은 어머니의 음성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인 아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고려장 제도가 성행하던 시절, 노모를 산 속에 버리러가는 아들이 산 중에서 길을 잃을까봐 솔잎을 꺾어 길을 표시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찌 더 부모의 사랑을 글로 적을 수 있겠습니까?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부모의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을 연상케 합니다. 탕자 같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부모를 통해 느껴봅니다. 피를 흘리며 낳은 자만이 하는 진한 사랑 말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이삭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잡고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리려 할 때, 이삭은 충분히 도망할 수 있는 힘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수양을 준비하사 이삭을 건져줬을 뿐 아니라 어디를 가나 백배나 더 좋은 것으로 주셔서 그의 생애를 순탄케 하셨고, 리브가 같은 좋은 아내도 주셨습니다. 룻을 보십시오. 그는 이방여인으로 유다지파인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자 나오미를 따라 남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와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보아스 라는 남편을 주었고, 다윗의 선조요,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자신의 뜻을 접고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거든 그리 하옵소서’ 라고 고백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또 돌아가시기 전에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리아와 평생 동행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제자 중 가장 오래 살아 요한계시록까지 쓰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이 땅에 잘 되고 장수하는 법이 무엇인 줄 압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잘 되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은 바로 율법을 귀히 여기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이란 곧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 행하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 중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큰 첫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생각해 보십시오. 보이는 부모도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보이지도 않는 영적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고르반’이라는 명목으로 부모공양의 책임을 면제받았습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헌납’을 서약한 것으로 재산을 성전에 바치겠다고 서약하면 그 재산을 언제 바치든지 관계없이 부모 공양을 면제받았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 칭하시고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라고 통탄해 하셨습니다. 혹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일 때문이라고 하면서 부모에게 소홀하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입니다. ‘효자집안에 충신난다’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하나님께도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부모에게 효도합시다. 돌아가신 뒤에 묘자리 잘 잡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옷 사드리고, 맛난 음식 사드리고, 용돈 많이 드리는 것도 효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것이 가장 큰 효입니다. 할렐루야.
효도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본을 보이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면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