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목자를 믿고 따름이 믿음의 첫 걸음이죠!
저는 할아버지가 절을 지어 바칠 정도로 철저한 불교적 가풍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 가정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어 노모는 믿음생활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4형제 중 막내인 저는 교회 문턱을 넘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게 있어 목사님들은 헌금 잘 걷어내는 사기꾼 정도로 인식되고 있어 교회는 발걸음조차 안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노모(老母)는 ‘능력 있는 목사님 비디오를 미장원에서 빌려왔다’며 꼭 한번 볼 것을 권했습니다. 저는 노모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해 억지로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달랐습니다.
먼저 제가 생각한 목사님들과는 이미지와 옷차림부터가 달랐습니다. 그리고 약간 은혜란 것도 받았습니다. 노모는 그런 저에게 교회 갈 것을 권했고, 저는 효도하는 셈치고 지나가는 말로 ‘한번 가보죠.’라고 했습니다. 노모는 당신이 다니시는 교회에 간다고 생각하고 기뻐했지만 저는 흰 옷 입은 그 목사님의 교회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누구인지 이름도 몰랐기에 비디오를 빌려온 미장원에 어렵게 확인한 후 인천예수중심교회로 첫발을 디뎠습니다.
96년 6월 23일, 그 주일은 이 시대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말이 빨라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또 기도라고 하는 것이 개구리 울음소리로만 들려 머리가 아프고 정신도 없고 해서 밖으로 나와 담배만 줄창 피워 됐습니다. 노모는 그런 저를 보고 세 번은 사람의 의지로 가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니 세 번이라도 가보고 포기하라며 닦달했습니다. 억지로 가는 걸음이었기에 예배시간을 맞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시간에 집에서 출발했습니다.
한 번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예배시간까지 도착시켜주시지 않겠습니까?’라며 농담을 하며 출발했습니다. 나중 집에서 교회까지 세어본 사실이지만 신호등이 모두 27개였는데 계속 파란불이 켜져 시속 120km로 달렸고, 단 10분 만에 권사님과 노모를 예배시간에 안착시켜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도착하자 웬일인지 제 몸은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좀 낫게 해달라’고 승용차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시동은 걸지 않고 에어컨만 튼 상태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예배가 한참 진행되었을 때 잠에서 깬 저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는데 이미 배터리는 방전된 상태였습니다. 저는 담배를 피면서 “당신이 전지전능하고 살아계신다니 차 시동이나 한번 걸리게 해 줘 보소.”라며 기도 아닌 기도를 했는데 환상 중에 아름다운 천사가 보였고, 시동을 걸자 덜커덕 걸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 순간 저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네 번째 교회에 출석한 주일에 총회장 목사님에게 안수기도를 받자 온 몸에서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죄가 떠오르고 회개가 터졌습니다. 예배당을 나온 저는 길 가운데 앉아 창피한 것도 모르고 대성통곡을 했고, 다시 차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실컷 울었습니다. 사업이 번성하자 깊지 않던 믿음은 어느 덧 사라졌고, 마침내 2001년 ‘흉비통’이란 병명으로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죽음의 문턱까지 갔습니다.
의식이 혼미해질 때 저는 히스기야가 자신의 선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한 것을 떠올리고는 제가 행한 일 중 선한 것 한 가지 만이라도 기억하시어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간구하곤 의식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다시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인천 교회 새성전 공사에 주님은 저를 건축 부위원장이라는 큰 직분을 안기셨습니다. ‘저를 세우시고 영의 말씀을 먹여주시는 목사님을 믿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각오로 묵묵히 목사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낱 풀과 같은 인생을 연장시켜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맡은 자리에서 끝까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