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가 사람 잡는다 (렘 38:17~ 39:7)
세계 2차 대전 말인 1945년 8월 6일, 폴 티베츠 대령의 지휘하에 B-29 에노라게이호는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이는 일본이 태평양 미해군의 거점인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을 자극했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이 원자폭탄이 있기 전 미국은 일본에 대해 ‘항복하라’고 사전경고를 했습니다. 한편 일본측에서는 항복하자는 쪽과 강경대응하자는 쪽으로 양분되어 팽팽히 맞서다가 ‘설마 세계 여론이 있는데 어떻게 원자폭탄을 투하하겠느냐.’ 며 맞대응하기로 최종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경고를 무시하자 바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일본 천황은 즉각 항복하기에 이릅니다. 이 일로 최소한 11만 명이 사망했고, 반경 3km가 넘는 지역 안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설마’가 사람을 잡은 것입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하는 잘못된 믿음과 방심의 결과로 크게 낭패를 볼 때 ‘설마가 사람 잡는다’ 라는 말을 씁니다. 아주 작은 일, 아주 사소한 방심이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려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양이나 염소 중에서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을 취하여 그 피를 집 문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표적이 되어 재앙이 넘어가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일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 그대로 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설마 그렇게 안한다고 무슨 일 나겠어?’ 하며 명령을 따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자는 애굽 사람과 함께 동일하게 모든 처음 난 것, 곧 장자는 물론이고 생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잃었을 것입니다.
설마란 이처럼 완전히 믿지 못할 때 생기는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1%의 불신은 100%의 화를 자초하게 하는 법입니다. 마치 개미 한 마리가 댐을 허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드기야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애굽과 밀통을 하며 동맹을 맺어 바벨론의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아는 ‘그러지 말고 바벨론에 항복하면 살게 되리라’고 시드기야에게 권면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측근의 말만 듣고 예레미아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그 결과 바벨론이 쳐들어와 시드기야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게 됩니다. 그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과 귀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시드기야 자신은 눈이 빠진 채로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아 선지자의 예언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이 성을 갈대아인에게 붙일 것이며,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할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는 예레미아 선지자의 예언을 몇 차례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갈대아인에게 항복할 경우 연약하고 줏대 없는 왕으로 비춰지는 것이 두려워 이를 무시한 것입니다. ‘설마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까’ 했겠지요.
시드기야를 보고 있노라면 이라크의 후세인이 생각납니다. 대국에게 덤비는 것은 스스로 자충수를 두는 것입니다. 후세인도 ‘설마 미국이 선제공격이야 하겠어?’ 하며 미국을 자극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UN의 동의를 얻지 못했지만 공격했고, 지금 후세인은 철장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강자 앞에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 권력자 앞에서 ‘배 째라’라는 식의 우격다짐은 미련한 행동입니다. 강자의 힘을, 권력자의 배경을 지렛대 삼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아부니 아첨이니 하는 말로 매도하면 안 됩니다.
한겨울 집주인에게 대들었다가 ‘나가라’하면 어쩌겠습니까? 자존심이 밥먹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큰 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시드기야, 미국에 고개를 든 후세인에게 기다리던 것은 비참한 최후였음을 기억합시다. 중국 한신은 자신의 수치를 뒤로하고 힘 있는 자의 가랑이를 기어서라도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일을 기약한 후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그 지혜를 배웁시다. 예지력과 선견력이 없는 지도자 때문에 백성이, 단체가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선견력과 예지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한 치 앞을 구별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자녀는 장래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멀리 볼 수 있고, 자세히 볼 수 있는 망원경과 같은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며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 분이 어찌 우리의 출입을 알지 못하시겠습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악한 마귀는 1%의 설마라는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허점, 아주 미세한 방심을 타고 들어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벌써 몇 년 전이 일이 되었습니다만 저는 아직 생생히 기억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느 날 김집사가 흐느끼며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 남편이 그만….” 자초지정을 들어보니 김 집사의 남편이 타이어가 파열되는 바람에 차가 전복되어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황급히 병원을 찾은 저에게 김집사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아침에 지방에 출장을 간다고 하길래 ‘타이어가 너무 낡았으니 갈고 가세요’라고 제가 말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갔다와서 갈지 뭐’ 하고 갔어요. 설마 사고가 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의외로 사고의 원인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것이 불씨가 되어 큰 불을 내는 것입니다. 산불의 원인이 거의 담뱃불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설마’ 했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치게 될 것입니다.
오랜 세월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쳐 모세를 향하여 원성을 높였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많은 자가 죽었습니다. 그제야 하나님과 모세에게 범죄한 것을 깨달은 백성들은 기도했고, 모세도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리라’ 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즉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것을 바라본 자마다 다 치료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설마 그것을 본다고 불뱀에 물린 것이 치료되겠어?’ 하고 쳐다보지 않은 자는 죽었을 것입니다. 놋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설마 예수를 믿는다고 죄가 다 씻어질까?’ ‘예수 이름만 부르면 정말 구원을 얻을까?’ 하고 의심하고 믿지 않는 자는 영멸의 길을 갈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설마가 사람을 잡는 것의 극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안전합니다. 악한 것이 감히 삼키지 못할 것입니다. 눈이 있으나 소경이요, 귀가 있으나 귀머거리인 사람의 안목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십시오. 그 분만이 영생의 길까지 당신을 안전하고 평안하게 인도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
강자의 힘을 빌리는 것은 지렛대를 이용하는 것과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