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지언정 포기하지 않으리라 (삼상 6:1~16)
1909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체포되었고 곧바로 사형당했습니다. ‘이 한 목숨을 던져 내 나라를 독립시킬 수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그는 평생을 조국을 위해 일하다 그렇게 갔습니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명제 앞에 자신의 목숨은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집안은 반목질시(反目嫉視)하는 관계로 그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죽음으로 그들의 사랑을 완성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목숨보다 귀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 투옥되어 심한 고문으로 쇠약해져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절할 수 없다’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 그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때가 있고, 목숨을 던져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확실한 목적과 목표가 있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번 에콰도르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목회 20년의 세월을 돌아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다시 돌아가라면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세월, 뒤돌아보기조차 눈물겨운 20년의 세월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갔습니다. 교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가족과 친구마저 다 떠나고, 집에서 쫓겨나는 등 안팎으로 숱한 모함과 핍박, 환난이 휘몰아쳐 왔습니다.
정말 피눈물을 삼키며 목회 20년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암소의 심정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젖이 나는 암소는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가야했습니다. 새끼소의 울부짖는 소리를 뒷전으로 하고 젖을 흘리며 가는 어미소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는 새끼소를 보지 못한다는 것과 가면 번제가 될 수밖에 없는 그 어미소의 참담한 심정을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그러나 어미소는 뒤돌아보지 않고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반드시 가야 할 길이기에 비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앞길을 막아도 주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내가 비록 죽을지언정 제게 주어진 사명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뭇 영혼들을 생각하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실 주님을 생각하면 갈 길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벧세메스는 ‘태양보다 밝은 집’이란 뜻입니다. 벧세메스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이며, 영원한 소망이며,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메는 소가 선택된 것처럼, 사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자요,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간 사람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갔고,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로마에서 전도하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으며,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X자형의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 베임을 당했으며, 빌립은 소아시아 부르기아에서 기둥에 매달려 죽었으며, 바돌로메는 인도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전도하다 창에 맞아 죽었고, 마태는 이디오피아에서 목 베임을 당했으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죽었고,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대신 제자가 된 맛디아는 돌에 맞아 이디오피아에 죽었습니다. 이들 모두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사명(使命)이란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어떻습니까? 예수 때문에 인격에 조금 손상이 오면 돌아서고, 예수로 인하여 조금 손해를 볼라치면 반대쪽에 서지는 않습니까? 적당한 수준에서 신앙을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꼭 목숨을 내어 놓아야 순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때문에 인격의 모욕을 당하는 것, 예수로 인하여 손해를 보는 것, 예수 때문에 따돌림 당하는 것 모두 순교인 것입니다. 내 자리에서 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 내 처한 상황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궤를 짊어지고 벧세메스로 가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산다면, 내가 쇠하여져도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요, 순교인 것입니다.
우리 교인 중에는 명절 때만 되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사 문제가 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제사를 안지내겠다고 하다가 얻어맞기도 하고, 때로는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만은 타협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제사 지내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니 하나님보다 더 큰 자가 있으면 거기에 절하라고 가르칩니다. ‘대충 흉내만 내라’, ‘제사 지내라고 돈만 보내라’, 이렇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이 맞고 오면 어찌 제 맘이 안 아프겠습니까? 그 고통을 제가 모르는 바가 아닌데요. 저도 제사 안지낸다고 쫓겨난 경험이 있는데요.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십자가요, 그때가 하나님의 궤를 매고 가는 어미소가 되는 때이니 감사하라고 할 수밖에요.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영광된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와 온갖 수모를 겪으셨으며 당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미물만도 못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말입니다. 그 예수 때문에 잠시 당하는 고통과 환난, 수욕은 오히려 감사할 일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처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라고 당당히 외쳐야 하지 않을까요?
해외집회를 다니다보면 많은 방해공작에 휩싸이곤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정신으로 기도하고 나가면 오히려 더 큰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럴 때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진다면 제일 좋아할 것은 악한 마귀라는 것을 저는 알기에 감사하며 더욱 박차고 나갑니다.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비록 죽어도 얻어야 하는 것이 새생명입니다. 목숨은 버릴 수 있으나 생명은 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주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영광의 면류관을 받고, 주를 위해 죽으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의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 주를 위해 사는 것, 그것은 벧세메스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길은 좁아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새끼소를 떼어놓고 가는 심정이 되더라도 벧세메스로 가야 합니다. 한번도 메어보지 않은 멍에 때문에 아프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궤를 메야 합니다. 가서 죽을지언정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가렵니다, 벧세메스로.
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멈출소냐 목적이 분명하면 넘어지지 않는다
병사는 죽어도 전쟁은 이겨야 하듯 핍박이 와도 예수는 증거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