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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창 12:1 ~20)

228호 · 2004-07-08

1992년, 종교분야의 노벨상이라는 템블턴 상을 수상하신 분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경직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90세였습니다. 수상을 위해 단에 오른 한경직 목사님은 뜻밖의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평생 교계의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었던 목사님이 괴로웠던 속내를 드러내자 장내는 순간 숙연해졌습니다. 그것도 잠시, 수상식장의 모든 참석자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를 밝히는 노(老) 목사의 용기에 대한 따스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이 고백은 분열과 대립을 일삼던 한국교회와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었었습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누구나 오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니까요. 하나님 외에 어느 누가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선친들,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의 삶은 완전무결했나요? 그들 모두 감추고 싶은 오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었단 말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기근이 심하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사래의 아름다운 외모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바로가 사래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곁에 두고 싶어 하자 아브람은 살아 남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 속입니다. 자기가 사래의 남편이라고 하면 바로가 자기는 죽이고 아내만 취할까봐 아내를 누이라 속여 스스로 바로 앞에 내놓은 겁니다.

이 말도 안되는 일을 누가 했냐고요?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친구라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아내를 팔아먹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대해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오히려 바로에게 재앙을 내려 아브람에게 사래를 돌려주게 하셨습니다. “내 이름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고 호통을 치셔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 없이 사래를 돌려주셨습니다. 이때 아브람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제 이야기를 하면 아브람의 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군 제대를 하고 얼마 되지 않을 때 의협심이 지나쳐 사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 힘으로는 도저히 수습을 할 수 없어 도망쳤습니다. 그때 제 아버지께서 피해자를 만나 합의를 했습니다. 상당한 액수를 지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이 잘 수습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저는 집으로 갔습니다.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어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말씀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요. 한 참 후에 어깨를 치시며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그후로 저는 부모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말씀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일평생 순종으로 일관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허물을 덮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일입니다. 그것도 비자 앞에서 저주하며 맹세하며 말입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한 고초를 받으시던 예수께서 베드로가 말하는 것을 다 들으셨을 겁니다. 어쩌면 눈도 마주쳤을지 모르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말입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을 확인하신 주님. 그때 베드로의 심정을 헤아려 보셨습니까? 베드로의 가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을 겁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이 후로 베드로는 더는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덮어주신 예수의 사랑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낙심해 있던 자신을 일으켜 세운 예수의 명령을 받들어 예수의 양 떼를 먹이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잘못했다고, 실수했다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더욱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계기를 마련하십니다. 둘째 아들이 가지고 나간 재산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는 다시는 아버지라 부를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난 일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가락지를 끼우고 동네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뼈저리게 느꼈을 겁니다.

그럼 이 아들이 어떻게 변했겠습니까? ‘한 번 나갔다왔더니 대우가 좋구나.’ 하고 또 나갔을까요? 더욱 진실되고 충직한 아들이 되었지 않았겠습니까?

자식은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넘어지면 넘어진 자식보다 이를 지켜보는 아비, 어미의 마음이 더욱 아픈 법입니다. 자식이 실수하면 남들이 볼까봐 얼른 덮어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매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조금 잘못하면 벌주고, 조금 실수하면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왜 죽이셨습니까?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으시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우리가 좀 실수를 합니까? 죄를 나열하자면 지구를 몇 바퀴 돌아야 할 만큼 많을 겁니다. 그것을 주님이 몸을 찢어 덮으셨습니다. 주님의 붉은 피가 우리의 가슴에 붙은 주홍글씨를 다 덮어버린 것입니다. 그 사랑을 체험한 한경직 목사님은 예수를 평생 전파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들을 드리기까지 순종했고, 베드로는 예수를 위해 온전히 나를 드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는데 우리는 주를 위해 무엇을 하며, 주께 무엇을 드릴까요?

우리는 예수께 빚진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잘못에 대해 얼마나 관대합니까? 남은 고사하고 내 가족과 내 교회의 실수를 덮어주고는 있습니까? 덮어주지 못하고 정죄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이는 마치 일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나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득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4).

남편이 잘못했을 때 박박 바가지 긁지 말고 더 맛있는 반찬으로 대접해 줍시다. 아내가 혹 실수를 해서 다리미질하다 옷을 좀 태웠어도 “여자가 그것도 못해?” 그러지 맙시다. 자녀가 혹 시험을 잘못 치러 성적이 엉망이래도 등을 한 번 두드려줍시다. 그러면 공부하지 말래도 부모님 생각해서 공부합니다. 넘어진 성도가 있습니까? “믿음이 없구먼. 쯧쯧….” 그러면 정말 시험듭니다. 가서 손을 잡아 일으켜줍시다.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때론 더 강한 교훈이요, 메시지가 될 겁니다. 회초리보다 강한 것이 사랑이거든요.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실수가 용납된다고 매일 실수투성이가 되면 안 됩니다. 걸음마 배우는 아이가 넘어질 때 안아준다고 어른이 되어서도 넘어지면 비정상인 것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실수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에 감사해서 주를 위해 힘써야 하며, 또 그 사랑을 실천하여 우리도 내 가족과 이웃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할렐루야.

실수를 두려워 말라 단지 경험했을 뿐이다

과거의 노예가 되지 말고 미래의 주관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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