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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고착된 생각에서 깨어나라 (눅 18:1~8)

216호 · 2004-04-14

장독에 개구리를 넣고 뚜껑을 닫아 놓으면 개구리는 어떻게든 장독을 탈출해보려고 힘껏 점프를 해댑니다. 그러나 점프를 할 때마다 뚜껑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상처를 입다보면 어느새 개구리는 장독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 도전을 포기하고 점차 장독 안의 생활에 적응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장독뚜껑을 열어놓아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되지요. 그래서 그 좋은 개울물에 한 번 들어가지 못하고 평생 장독에 스며든 빗물에 발이나 담그다 가는 신세가 됩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 생각 위에 뚜껑을 하나 덮어 놓았습니다. ‘넌 태어날 때부터 원죄로 인하여 죄인이야.’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절대 안 돼.’ 이런 묵직한 뚜껑을 덮어 우리를 가두고 옭아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뚜껑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어두운 구덩이에서 어서 나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이 날이 부활절입니다. 뚜껑을 여니 우리 안에 눈부신 빛이 파고 들어오는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무덤 속에 갇혔던 생각, 앉은뱅이 된 생각에 빛 되신 하나님의 생각이 파고 들어올 때 부활의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생각, 즉 가능한 생각으로 변하고, 국한된 생각이 무한계의 생각으로 바뀌며,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변할 때 우리 삶의 전반에 부활의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자동차의 키와 같아 키를 꽂고 시동을 걸아야 자동차가 가동 되는 것처럼, 생각이 살아 ‘부르릉’ 거릴 때 삶이 원기왕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뚜껑을 열어놓아도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오기를 겁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박쥐가 깜깜한 곳에 적응한 것처럼 말입니다. 노 없는 배처럼 흐르는 물에 인생을 맡기고 가는 자들이 많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운명론적 생각이 고착되고 만성화된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해봤는데 내 힘으로는 안 됐어’하며 주저앉아 있습니다. 그 때는 뚜껑이 덮여 있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뚜껑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찢고 피를 쏟아 그 뚜껑을 제하셨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뚜껑을 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나 거기서 나오게 하는 것은 당신의 생각입니다. 생각은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생각이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고로 생각은 씨앗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배추씨를 심으면 배추를 거두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심으면 때가 되면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생각의 결과는 당연히 아름다운 것이지요.

아프리카에 신발을 팔러 두 판매원이 갔는데 한 사람은 아무도 신발을 신지 않아서 신발을 팔 가능성이 없다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도 신발을 신지 않았으니 무한대로 팔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자를 따랐으면 아프리카 진출의 기회를 놓치고 경제적 타격을 입었을 것이나, 후자를 따랐기에 무한한 판매망을 구축했고 대성공을 이뤘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생각의 차이란 이처럼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나안을 탐지하러 간 10명의 정탐꾼과 여호수아, 갈렙의 비유와 같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은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긍정적인 생각을 소유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의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떤 씨를 심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과부는 돈도 없고 기댈 데도 없는 한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만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재판관은 나의 원한을 풀어줄 거야’ 라는 생각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기에 날이면 날마다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이 재판관이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니 얼마나 오만방자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자도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을 보십시오. 결국 과부의 청을 들어 주지 않습니까? 생각이란 이처럼 대단한 위력이 있습니다.

이 과부 같은 자가 우리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H건설을 하는 김 집사인데요. 그는 아내가 미용실을 해서 얻는 수입으로 살아가던 실업자였습니다. 별 의욕도 없이 허송세월을 하던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주입되자 그는 건설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디 건설업이 그리 만만한 것입니까? 경험도 없는 자에게 누가 수주를 주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어떤 회사의 결재권 있는 자를 6개월이나 쫓아다녔습니다.

나중에는 그 사람이 진절머리를 내고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당신이 우리 회사건물 지어”라며 공사권을 김 집사에게 넘겼습니다. 그것이 기초가 되어 지금은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저는 김 집사가 분명 대기업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의 생각이 변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 과부처럼, 김 집사처럼 당신도 반드시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매사에 매달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하다가 중단합니다. 내일이면 재판관이 해결해줄 텐데, 내일이면 공사수주를 딸 수 있는데 오늘 ‘안 돼’라고 생각을 접습니다. 여리고를 여섯 번 돌고 무너질 아무 징조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만 두고 있습니다. 한 번만 더 돌면 와르르 무너지는 데 말입니다. “내 주제에 뭐가 돼.” 하며 포기하고 맙니다. 이게 바로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겁니다.

제게 안수를 받으러 오는 사람 중에도 어떤 사람은 ‘오늘 안수를 받으면 반드시 나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 생각 없이 남이 받으니까 안수 받으러 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고침을 받고자 하는 생각의 소유자는 병 고침을 받으나 그냥 온 자에게 역사가 일어날 리 없습니다. 제게서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가나 역사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류 (+)와 (-)가 만나야 전기가 발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믿음 곧 하나님을 믿는 생각이 합해져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활절입니다. 이 부활절을 기독교의 연례행사로 치부하거나 기념일로 간주하여 어떤 형식만을 갖추는 것은 주님의 바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잠자던 것, 죽었던 것이 살아나고 변화되어야 진정한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이번 부활절에 정신적 장애가 치료되어야 합니다. 육체적 장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정신적 불구입니다. 육체적 장애를 확고한 생각과 정신으로 이겨내고 성공한 자들이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나 헬렌 켈러 같은 자들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생각을 주입했더니 죽은 것 같았던 사라의 태를 통해 백세에 이삭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우리를 바꾼다면 죽은 것 같았던 삶이 살아날 것이며, 바랄 수 없는 것이 우리 앞에 전개될 것입니다.

아직도 장독 안의 개구리로 살고 싶으십니까? 평생 팔자타령이나 하고 앉아있을 겁니까? 고착된 사고를 버리고 일어나 뜁시다!

우리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존재할 뿐이다

범사에 때와 기한이 있다 포기하지 않으면 꼭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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