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 (시 16:1~11)
그릇이란 그 안에 무엇을 담았느냐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 합니다. 아무리 값비싼 그릇일지라도 그 안에 쓰레기를 담으면 그것은 쓰레기통인 것입니다. 그러나 질그릇일지라도 보배를 담으면 그것은 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똥을 담으면 똥바가지요, 쌀을 담으면 쌀바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교회로 쓰고 있는 88체육관은 평소에 가수들의 콘서트장이 되기도 하고, 시장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금요일과 주일에는 교회가 됩니다. 이는 건물의 외형은 그대로이나 그 안에서 무엇이 행하여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명명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느냐에 따라 진가를 달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가득한 자는 그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신 자는 하나님의 자녀요, 선택된 하늘나라 시민인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잠시면 사라질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가슴에 담고 있는 자 역시 초개와 같은 인생이며, 곧 썩어질 것이므로 이를 아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꽃병에 꽂아둔 꽃과 같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보여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압니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자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입니다. 고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람은 근원이 있는 자 곧 예수를 마음에 모신 자요, 아름다운 인생이란 예수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원 숙소 공사장에서 저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작업복을 입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들에게 생소하고 버거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기쁨으로 협력하고 힘쓰는 것을 바라보면서 사람의 눈으로야 어떻든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벽돌을 나르는 자매, 무거운 철근을 짊어진 주의 종들, 그들이 과연 하나님이 마음에 없다면 이것을 하겠습니까. 돈벌이라면 하루 종일 기쁨으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기쁘게 일할 수 있는 까닭은 오직 하나, 그들 마음에 예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들을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환경이란 하나님을 모신 곳이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흙먼지가 날리고 소음이 가득한 공사장에서 찬송이 울려나고 웃음꽃이 피는 것을 볼 때 환경이나 여건과는 무관하게 아름다움은 결정되어 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솔로몬은 천하일색의 여인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정말 보잘것없는 여인을 흠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계달의 장막 같고 꺼칠한 술람미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순수한 사랑을 본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이처럼 외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형으로 반영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면을 무엇으로 채울 때 외형에까지 그 아름다움이 드러날까요? 지식을 채운다고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가 계셔야 합니다. 그 분이 마음에 가득할 때 얼굴이 온화해지고, 아름다운 말씨로 변하게 되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되며, 이웃을 돌아보게 되며, 겸손한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전도자는 세상의 것들은 다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최고, 최상의 것들을 다 누리고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다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은 다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은 ‘내게 줄로 내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을 둘러싼 환경이나 조건이 전도자보다 나았기에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까? 그는 사울에 쫓겨 다녔고, 아들을 피해 도망 다녔던 처참한 삶을 경험한 자이며 전쟁도 많이 한 자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한 것은 그의 마음에 늘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늘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로 인하여 기뻤던 것입니다. 그가 죄로 인하여 침상이 젖도록 회개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실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그의 복과 기쁨과 삶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이런 고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최대의 찬사인 ‘나와 마음이 합한 자’라 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계실 때 그를 통하여 보는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며,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당신이 가진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명예와 부귀로 치렁치렁 장식한 자들이 아름답게 보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곧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명예와 부귀도 영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이것은 정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영원히 사는 복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당신을 둘러싼 환경이 그리 쾌적하지 않거나 상황이 나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요, 당신에게 줄로 내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자는 세상 사람과 구분된 자요, 선택된 자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결국은 미끄러져가는 것이라고 잠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근시안적인 눈을 버리고 멀리 보고 크게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보여도 우리는 부요한 자요, 무명한 자로 보여도 유명한 자이며, 미련하게 보여도 가장 아름다운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그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누구나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의 정의를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히13:9).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그 안에 거하며 그를 위한 일을 하는 자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를 모신 환경 자체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은 일생(一生)입니다. 그리고 덧없이 짧습니다. 주를 위해 우리의 일생을 내어 던질 때 아름다움은 극(極)에 이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최상의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복음을 위해 자신을 버렸던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죽은 것을 아름답다고 할 자는 없습니다. 생명이 있어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주를 위해 삽시다.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발길이 아름답고, 복음을 외치는 소리가 아름답고 사랑을 실천하는 손길이 아름답습니다. 제가 불철주야 복음을 들고 전세계를 누비는 것은 하나님께 아름다운 자라고 기억되고 싶어서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우리는 다 주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 우리도 주를 위해 삽시다. 할렐루야.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