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아질지언정…
나는 후대가 이렇게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분은 다 써서 낡아져 가셨다.”라고.
나는 써서 낡아질지언정 녹슬어 버려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매사 최선을 다한다. 쉬지 못하고, 멈추질 못한다.
나는 ‘잊지 말자, 6·25!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다시 뛰려고 시동을 거는 중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것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 한다. 이 나라에 다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없어야한다. 시도 때도 없이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이 코앞에 있는데, ‘설마 전쟁이 나겠어?’ 하며 수수방관만 해서 되겠는가. 이런 나의 의중을 누가 알까? 다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이도 있는데 일 좀 그만 벌이라’ 걱정한다. 그러나 나는 써서 닳는 편을 택하련다. 녹슬어서 버려지고 싶지 않다.
왜 녹이 슬까? 쓰다가 안 써서 그렇다. 자동차도 쓰다가 안 쓰면 녹슨다. 머리도, 몸도 쓰다가 안 쓰면 녹슬어 안 돌아간다. 그것보다는 써서 닳아지는 편이 낫다. 그러면 후대는 나의 업적을 기릴 것이고, 나를
‘참 열심히 산 사람’이라며 존경하게 될 것 아니겠나.
하물며 하나님의 평가는 어떨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마25:21)라고 하시지 않을까.
닳아 버려지는 것이나 녹슬어 버려지는 것이나 같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닳아 버려지는 것에는 ‘참 좋은 연장이었는데….’ 하는 주인의 애틋함이 남는다. 그러나 녹슬어 버려지는 것에는 ‘어차피 필요도 없는데….’ 후련함만 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쓰다 닳아 낡아지길 바랐다. 그리고 그에 대한 주인의 후한 평가를 기대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4:7~8).
‘쓰다 닳아 낡아질 것인가, 녹슬어 버려질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