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참는 사랑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잘 나와 있다. 가장 먼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참는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초고속 인터넷망이 전국에 깔렸고,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즉각적인 교류를 갖는다. 실시간으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글과 사진을 올리고, 올린 글은 친구들에게 즉각적으로 알림이 가고, 상대는 다시 즉각적으로 반응을 한다. 지금 우리 삶을 구성하는 기술들이 우리를 즉각적으로 표현하고 반응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럴까. 인터넷이 잠시 안 되면 난리 법석을 떤다.
그러나 적어도 ‘사랑’이라는 관점에서는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오래 참는 것이 사랑이며, 서로 사랑하라, 상대에 대해 오래 참아주라고 말씀하신다. 5G처럼 빠른 반응과 응답을 원하는 현대인에게 누군가를 오래 참아주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오래 참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토록 참아주신 것처럼. 죄를 짓고 회개하고 다시 죄를 짓는 우리를 참아주실 뿐 아니라 사랑으로 품으시고 한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은 이웃에게, 내 형제에게, 내 친구에게 오래 참아주는 것을 말한다. 잘못을 했을 때 버럭 화내지 말고 참아주고, 답장이 느려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참아주고, 약속 시간에 조금 늦어도 좀 참아주자. 그러면 우리 사회가 더 아름답게 변화되지 않겠는가.
김성일 성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2~3). 예수님의 말씀이 뼈저리게 와 닿는 요즘이다. 정치인이며, 경제인이며, 연예인이며, 종교인이며 할 것 없이 그들이 과거에 은밀하게 저질렀던 비(非)윤리적이고 비(非)도덕적인 일들이 기술의 발전과 피해자들의 인식전환으로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그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았던 탑이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고, 촬영과 녹음이 가능한 스마트폰으로 인해 대중들은 이제 언론의 소비자가 아닌 ‘걸어 다니는 언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있는 데 반해, 대중들이 드러나는 이들에게 요구하는 윤리·도덕적인 기준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하물며 산 위에 있는 동네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그럴까? 총회장 목사님께서 몇 주 전 설교에 “목회하는 지난 35년 동안 핍박과 환난과 모함을 견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남의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살 것인가를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하신 말씀이 계속 와 닿는다. 목사님은 윤리·도덕적으로 흠을 잡히지 않기 위해 기도를 쉬지 않으시고 자신과 싸우며 수많은 유혹과 시험을 뿌리치셨다. ‘큰 자가 되기 전에 먼저 깨끗한 자가 되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에 옮기며 우리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본이 되고 계신 것이다.
IQ(지능지수), EQ(감성지수), AQ(역경지수)가 사람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면, 이제는 점점 MQ(도덕지수, Moral Intelligence Quotient)가 강조되고 있는 시대인 듯하다. 그릇이 아무리 값이 비싸도, 크기가 커도, 모양이 아름다워도, 다방면에 실용적일지라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 우리 또한 목사님처럼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나는 지금 깨끗한 그릇인가?’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신혁주 전도사
blessedmic@naver.com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
자연세계를 뛰어넘는 ‘초자연’의 세계를, 우리는 흔히 ‘기적’이라 부른다. 기적의 세계는 설명 불가의 사건들로 가득하다. 유한한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무한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할 말을 잃게 된다. 그러기에 기적적인 사건들은 우리의 메마른 신앙에 역동성을 더해준다. 그런데 기적을 신비주의로 폄하하거나 또는 성경에서 아예 삭제하려는 자들이 있다. 이는 신앙생활을 사변적으로 메마르게 만들거나, 도덕적 종교로 변질시키는 위험한 극단들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말씀에 더해, 기적이 늘 필요하다.
자연과 초자연으로 구분하는 우리 인간의 안목은 하나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초자연은, ‘또 다른 자연’에 불과하다. 오병이어의 빵은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 만든 빵이지만 그냥 놔두면 다시 썩게 되는 자연적인 빵이다. 동정녀의 잉태 자체는 초자연이었지만 출산의 과정은 자연이었다. 이미 죽은 나사로는 살아났으나 다시 자연적으로 죽었다! 하나님의 기적은 늘 자연과 하나 되어 일하신다. 자연도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분에겐 자연과 초자연의 경계가 없으시다. 그분이 섭리하시는 세계는 인과관계를 뛰어넘는 기적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신앙 가운데서도 내 안에 성령님이 와 계시는 것, 십자가 구원이 믿어지는 것, 억압하는 귀신이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는 것, 마지막 때 부활의 몸을 입는 것, 천국이라는 또 다른 자연 세계로 가는 것 등등 기적이 아닌 것이 없다. 영적 세계가 물질세계를 이끌어가는 것 자체가 신비이자 기적이다(히11:3). 특히,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가진 ‘이성’의 능력은 초자연의 가장 명백한 법칙이자 증거이다. 자연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 주기만 하나, 자연에 개입하여 의미를 불어넣고 상황을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다. 그래서 성령에 조명된 이성과 말의 권세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 되게 할 수 있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 하나님의 초자연적 세계를 함께 누리며 살 권세가 우리에게 있다. 기적은 늘 우리 가까이에서 반드시 존재하며, 우리는 기적을 늘 일상으로 경험하고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이다.
송직화 목사
jesus_allinall@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