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점은 하늘에
인생을 살다보면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게 된다. 물론 긍정적인 비교는 삶에 더 나은 발전을 가져오지만, 부정적인 비교에 마음이 더욱 쉽게 기울어지는게 사실이다.
학생은 ‘누구는 어느 대학교를 가는데 나는 재수를 하고 있구나.’라며 자책하기도 하고, 직장인은 ‘누구는 연봉이 얼만데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생각하기도 한다. 다른 가정을 보며 ‘누구 네는 아파트 몇 평에 사는데 우리는 언제 그런 데서 살아볼 수 있을까.’라며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어느 장로님이 축복을 받아 몇십 억대의 자산이 있다는 간증을 들으면 상대적인 초라함을 느끼기도 한다.
인생이 경주이고, 학생이 재수를 하고 있다면 이미 경주에서 진 것일 수 있다. 나이는 더 많은데 연봉이 더 낮고, 내 집 평수가 더 작다면 진 것일 수 있다. 단,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결승점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각자의 인생에 서 있는 그 자리는 결승점이 아니다. 요셉이 노예 혹은 죄수였을 때 그 자리가 인생이란 경주의 결승점이라 생각했다면 실패자였겠지만, 총리가 되었을 때 결승점이라면 성공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갈 때조차도 인생의 결승점은 아니다. 그 결승점은 바로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현재 내가 선 곳이 비록 낮은 곳일지라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 아직 경주는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선 곳이 성공자의 반열로 선두에 서 있다 해도 방심하면 안 된다. 아직 경주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 삶에는 자라며 고개를 숙이는 벼의 겸손함과 어느 상황에서든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같은 끈기가 필요한 것 아닐까.
우리들 인생의 결승점은 바로 하늘나라에 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이 처한 현실이 고달플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그 곳은 당신의 결승점이 아니다. 만사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면 감사와 겸손, 그리고 베푸는 삶이 필요할 것이다. 그 곳이 당신의 결승점이 아니기 때문에.
박찬영
cross35@hanmail.net
‘어째서’보다 ‘무엇을’
사람들은 보통 뜻대로 일이 안되고 환난이나 고난이 닥치면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라고 반응하며 원망이나 불평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라는 물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이탈리아에 ‘소오 엘리나’라는 여인의 이야기다. 엘리나는 일찍이 중국에 선교사로 갔으나 폐병으로 인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이제 병든 나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녀는 ‘어째서 나에게….’라는 원망 대신 ‘무엇을’이라고 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부친이 물려준 시골 농장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그 소출로 중국 선교를 도왔다. 그런데 환난의 바람이 또 불어왔다. 탈곡을 하던 중 오른손이 기계에 걸려 들어가 절단되고 만 것이다. 엘리나는 또 기도했다. “주님, 이제 오른손이 없는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그녀는 농장을 개조하여 양로원을 세우고, 버려진 노인들을 부모처럼 모시며 복음을 전하였다. 노인들은 그녀에게 ‘노인들의 어머니’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고, 그녀는 불행한 환경을 극복하여 가장 보람된 인생을 보냈다.
‘어째서’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을’은 도전과 사명감을 준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은 늘 ‘어째서’라는 원망과 불평뿐이었다. 그 결과 1세대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시각을 가졌기에 민족을 이끌 수 있었다. 사도 바울 또한 예수를 처음 만나고 눈이 멀었을 때 “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를 들어 유럽의 역사를 바꾸게 하셨다.
우리 이제 ‘어째서’의 부정을 버리고 새로이 기도하자. “하나님,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분이 우리의 갈 길을 지도하실 것이다.
김상욱 목사
ksw9669@hanmail.net
예수쟁이
대학시절, 그 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열정으로 전도를 하던 때였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교사를 맡아 거의 매일 교회에 가다시피 했었고, 대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같이 교회에 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학생들을 심방했었고, 노방전도에도 열중했었다. 그 시절 나의 세상 친구들은 동아리활동이나 미팅 등으로 대학생활을 즐겼지만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친구들이 나에게도 그런 대학생활의 기쁨을 수시로 권했지만 나는 교회 가기에 바빴다. 그래서인지 친구들은 그런 나를 예수쟁이라 불렀다. 사실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불릴만한 자격이 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친구들조차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한 번씩은 나를 따라 교회에 가게 되었다. 다시 가자고 이야기하면 어려워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나중에 가겠다고 미루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쉬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도 모두 나를 따라 한 번씩은 교회에 따라가거나 혹은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우리 교회에 정착하는 친구나 동료는 없었지만, 그들이 꼭 예수님을 믿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시간이 지나서 당시 그 친구들과 동료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여 아이 엄마가 되었는데, 지금은 나를 따라 교회에 갔던 친구들과 동료들 대부분이 감사하게도 각자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핸드폰에 나를 예수쟁이라 저장해놓고 만날 때마다 놀리듯 말했던 친구와 최근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랬던 그 친구가 지금은 교회에 다니며 매주 구역예배도 드리고 성경통독도 하고 있다 한다. 성인이 된 후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성경 속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상황들이 궁금하다며 전화로 묻는 친구들도 있다. 나를 생각하고 전화해준 것이 고마워 열심히 설명해주기도 한다. 씨를 뿌리면 언젠가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는 구나 생각했다.
그런 소식들을 전해 들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하다가 문득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결혼과 육아라는 핑계로 전도에 대한 갈망은 늘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느 순간 그 때의 가슴 속 열정 대신 ‘과연 될까,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이 어느새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주위에 있는 지인들이 다들 지식인이라는 생각에 종교적인 부분은 내가 침범하면 안 된다는 나름의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다. 전도하고자하는 마음으로 내가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보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는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다시 나를 돌아보게 하시고 또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분명하고 당당하게 내가 믿는 예수님을 전하는 그 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다짐한다. 쭈뼛대고 머뭇대는 모습은 이제 벗어버리고,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 나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그 분께서 가장 기뻐하시던 때로 돌아가야겠다. 다시 한 번 듣고 싶게 된 말. ‘그래, 나는 예수쟁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정효경
happy_holly@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