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라(마11:12)
다사다난했던 2016년을 보내고 이제 2017년, 새로운 해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새로운 해가 왔다고 해서 새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새로워져야 새 삶이 시작되고, 여러분의 생각이 변화되어야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작년까지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않았다면, 올해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며 삽시다. 그러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침노’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도전’하고, ‘모험’해야 합니다. 두렵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습니다. 현재에 만족하고 사는 수밖에요. 매일 그 밥에 그 반찬으로 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사실 침노는 불법입니다. 남의 집에 침노하면 불법으로 경찰에 연행됩니다. 남의 땅에 침노해서 말뚝 박으면 바로 쇠고랑 찹니다. 그런데 침노가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앞입니다. 어린 것들이 엄마, 아빠 자는 방에 덜컥 문 열고 들어와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할 때 여러분은 어떡하십니까? 또 저 혼자는 올라가지 못하는 곳에 올라가겠다고 떼를 쓰면 어떡하십니까? “알았다 알았어. 그만 떼 부려라.” 하고 원하는 것을 주고, 또 올라가고 싶어 하는 곳에 올려주곤 혹여 떨어질까 졸졸 따라다니면서 지켜주지 않습니까? 동일합니다. 여러분이 침노하면, 도전하면 애 타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신지라 도와주시고, 지켜주시고, 원하는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침노가 통한다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라’는 말씀이 이를 용납하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까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지 못한 것은 침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주제에 뭘 해?’, ‘내 팔자에 이 정도면 됐지’ 하는 생각이 여러분 스스로를 앉은뱅이로 만든 것입니다. 왜 부딪쳐보지 않습니까? 왜 도전해보지 않습니까?
‘니 해봤노?’가 18번이었던 고(故) 정주영 회장의 말은 명언 중의 명언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가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자들, 스스로가 안 된다고 결론을 땅땅땅 내렸으니 당연히 안 되지요. 그래놓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러겠어?’ 하며 하나님을 탓합니다. 여러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지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자를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리고 온 네 친구 이야기입니다. 하도 많이 해서 귀에 딱지가 앉았을 겁니다.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고치기 위해 네 명의 친구가 연합하여 예수님 곁에 가려하였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네 명의 친구는 ‘방법이 없다’고 하지 않고 지붕을 뚫어 병든 친구를 매달아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이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 뇌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운전자가 자동차에서 내린 것과 같습니다. 운전자가 내린 차가 움직일 리가 없지요. 그러나 어떻게든 이루겠다는 생각을 하면 방법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깨끗한 아리수라도 파이프라인이 녹슬었으면 녹슨 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소경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그의 생각이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든 눈을 뜨고야 말리라 하더니 도전하지 않습니까? 소경이 무슨 도전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고래고래 예수님을 부른 겁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겁니다. 도전하다보면 옆 사람에게 미쳤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무모하다고 자제하라고도 할 겁니다. 바디매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때 멈추면 안 됩니다. 바디매오는 더 크게 소리를 질러 예수님의 귀에 들리게 했고,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방팔방이 감지되지 않았지만 무조건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 또 바디매오 이야기네’ 하지 말고 그의 생각과 도전의식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지요. 그의 키는 평균 이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할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뵙고야 말리라’는 그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자, ‘안 보이니까 집에 가자’ 한 것이 아니라 ‘뽕나무에라도 올라가자’ 한 것입니다. 위대한 도전이요, 결단이지요.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도 할까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목적은 귀신 들린 딸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식사하는 곳으로 찾아가 간구했습니다. 침노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며 무시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일부러 개 취급한 것이지만, 당시는 이방인을 업신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라며 포기하지 않더니 결국 그 꿈을 이뤄냅니다. 사람들이 여기서 걸립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입니다. “나더러 개라고? 기가 막혀서.” 이런 자존심을 내세우면 종치는 겁니다. 목적을 이루는데 무슨 말라빠진 자존심입니까?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치를 당하시면서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말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친구에게 떡을 구하는 자나 누가복음 18장에 재판관을 찾아간 과부의 결말을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호박씨를 심으면 호박이 나고, 도토리를 심으면 참나무가 나는 겁니다. 씨를 보면 도저히 그 안에서 호박이 열리고 참나무가 날 것 같지 않지만,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호박을 거두고 참나무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박씨를 그대로 두면 썩을 뿐이고, 도토리를 그냥 두면 평생 도토리일 뿐입니다.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단해야 하고, 도전하고 행동해야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십니다. 그 분의 자녀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안 해서 못하는 것이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말씀하심으로 우리에게 용기를 주셨고, 또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며 자신감을 주셨습니다. 그래도 못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데요? 여러분이 지금 현실에 안주하고 사는 것은, 또한 못하겠다고 주저앉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무능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늙어서 못해!” 하십니까? 저는 지금부터 30대 생각과 도전의식을 갖고 살려합니다. 생물학적 나이로야 70이 다 되어가지만 그것은 숫자에 불과하니 생각을 젊게 갖고 다시 도전하는 삶을 살려합니다. 생각이 결과이기 때문입니다(렘6:19).
꿈은 분수라는 잣대를 가져다 대는 순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분수나 팔자의 벽을 넘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꾸세요. 썩은 생각은 썩은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썩은 나무에 물을 줘봐야 더 썩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러면 2017년을 기점으로 아름다운 미래가 꽃다발을 안고 달려올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나를 믿어주는 것만큼
내가 성장 발전하는 것이다
위대한 결단이
위대한 사람을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