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싸워서 이기는 습관을 들여라(창4:3~7)
당신이 상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신 주님의 소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은 일흔 번에 일곱 번도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돼지가 목욕을 시켜놔도 다시 그 자리에 눕는 것처럼 회개하고 또 죄를 짓는 일을 안했으면 하십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4).
요한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 기거하는 38년 된 병자가 나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이 병자를 보시고는 “왜 거기 누워 있니?” 하고 물으셨습니다. 병자가 물이 동할 때 자기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38년이나 병을 껴안고 살고 있다고 말하자 예수님이 그를 불쌍히 여겨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38년 된 병이 순간 씻은 듯 나았습니다. 이후 성전에서 다시 그 사람과 예수님이 만나게 되는데,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5:14). 주님은 “다시 병이 재발하면 나에게 와라” 하지 않으시고, 재발하지 않도록 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깊이 생각해볼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 붙들려온 여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여인을 잡아온 사람들의 양심을 치심으로 다 뒷걸음질쳐서 도망가게 하신 후에 주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다시 잡히면 넌 돌로 맞아 죽는다. 그럴 때 꼭 나를 찾으라’가 아니라 ‘다시는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의분에 못 이겨 경찰을 때린 적이 있습니다. 젊은 경찰이 제 아버님 친구 분에게 반말과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고 의협심에 불타 경찰을 구타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일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부모님이 나서 합의를 보고 일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 아버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맘고생 많았다. 합의가 되었으니 걱정마라. 하지만 다시는 이런 짓하지 마라.” 예수님이나 부모님이나 같은 마음 아닙니까?
믿는 자들이 죄짓는 거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대 사도인 바울도 죄 때문에 ‘오호라 곤고하구나!’ 했는데, 우리 같은 범인들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 죄를 안 지을 수 있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고 사도 바울은 그 다음 장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를 이기게 하신 힘을 성령이 주셨으니 감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도 바울이 받은 성령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동일하게 죄를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짓는 순간 마귀에 속한다는 사실을 압니까? 섬뜩하지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3:8). 그 다음 절도 볼까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를 짓지 못한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께로 났으니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으면서 죄를 물마시듯 하는 건 어찌된 영문입니까?
죄를 짓고 회개하면 우리 주님이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함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용서는 받지만 뿌린 씨는 거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했다는 다윗마저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12:10~11). 이것이 남의 아내를 취하고 그 남편을 죽인 죄의 대가였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말처럼 정말 이것은 사실로 이루어져 큰 아들 암논이 이복형제인 다말을 범하자 이에 분노한 둘째 아들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고, 그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요압의 손에 죽었으며, 셋째 아들 아도니아는 왕위 계승과 다윗의 첩을 달라고 하다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또한 압살롬이 다윗의 첩을 대낮에 왕궁에서 취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물론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도 다윗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죽었습니다. 씨는 하나 뿌려도 열매는 여러 개 열리듯이 죄의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컸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느라 죽을 고생을 한 모세, 그러나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요? 죄의 대가입니다. 므리바에서 반석을 두 번 내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기 때문입니다(신32:51~52).
저라고 예외겠습니까? 제가 목회 초기에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교회를 깨뜨리셨고, 제 사지를 마비시켜 버렸습니다. 더 이상 죄짓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저는 큰 자가 되기 전에 깨끗한 자가 되리라 마음먹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가장 행복한 자가 누구인지 압니까? 바로 내가 죄를 지을 때 일침을 놔줄 수 있는 자가 옆에 있는 자입니다. 꿀벌처럼 따끔하게 충고하고 충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행복한 자요 성공한 자입니다. 다윗 옆에 나단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왜 나를 까냐?’고 화를 냅니다. 세례요한에게 헤롯이 그랬고, 사무엘에게 사울이 그랬고, 예수님에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그랬습니다. 찔림을 받아야 가능성이 있는데 말입니다.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에 깨달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발람은 나귀가 사람소리를 내는데도 못 깨달았습니다. 귀가 막혔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 회개란 교회 와서 눈물콧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뉘우칠 회(悔)와 바꿀 개(改)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란 뉘우친 후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는 것, 그 죄에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전환을 말하지요.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 같은 습성을 버리고 단호하게 죄악을 잘라내는 것을 말합니다. 간음하던 사람이 간음 안하는 것, 거짓말하던 사람이 거짓말 안 하는 것, 불평하던 사람이 불평 안 하는 것, 다투던 사람이 다투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나는 간음 따윈 안해’ 이러시는 분들,
‘내가 무슨 살인을 해?’ 하시는 분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음욕을 품는 것으로 이미 간음이고(마5:28),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요일3:15). 그러니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기 전에 죄와 싸워 이기는 습관을 들입시다. 매번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고를 반복하면 언제 장성한 믿음이 되겠습니까? 흠 없고 점 없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당부가 무색하지 않겠습니까? 혹여 죄를 지었으면 회개해야 하지만, 죄를 짓기 전에 죄와 싸워 이깁시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러 오셨지만,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예수님처럼 피 뿌리기까지 죄와 싸워 이깁시다.
병중에 제일 무서운 병은 자각증상이 없는 병입니다. 눈이 안 보인다거나 허리가 아프다거나 속이 쓰리다거나 하는 증상이 나타나는 병은 초기에 병원에 가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은 대체로 아무런 증상이 없습니다.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3기다, 말기다, 온 몸에 퍼져서 손을 쓸 수 없다며 사형선고를 내리기 일쑤입니다.
하나님도 알고, 나도 아는 죄는 회개하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시는데 나는 모르는 죄,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자각증상이 없는 죄, 인지 못하는 죄가 가장 무서운 죄라는 겁니다. 왜요? 죄가 죄인지 모르니까 회개하지 않고 그 죄를 반복해서 짓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점검합시다. 매일 자신을 점검하고, 죄를 지으려는 자신과 싸웁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는 자가 됩시다. 할렐루야!
습관은 너를 선인으로도
악인으로도 만들수 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길을 막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