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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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5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품절남 재고녀

845호 · 2016-05-08
생명의 말씀

에서는 남성미가 넘치는 품절남(배우자가 생겨 일찌감치 결혼시장에서 품절된 사람)이다. 사냥 잘하지 꽃미남에 근육질 몸매에 탄탄한 복근, 가슴에 털까지, 이것뿐이랴?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말1:4),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반면 야곱은 어떨까? 생김새도 여자처럼 생겼지, 엄마 부엌일이나 돕는 마마보이요, 진열장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것과 같은 재고남(품절남의 반대개념)이다. 세상은 당연히 에서와 같은 품절남을 찾는다. 그래서일까?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가볍게 여기는 죄를 범하고, 그래서 하나님 은 ‘내 힘, 내 재주, 내 지식으로 살겠다.’는 에서를 미워하셨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랐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장자의 축복을 사모했고,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어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셨다. 그런가하면 야곱은 형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도망갔다가 얼굴 예쁘지, 몸매 예쁘지, 총명하기까지 한 라헬에게 반 해버린다. 그는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의 머슴살이를 지냈다. 그러나 첫날밤을 자고 나니 라헬이 아니라, 재고녀인 총기도 없고, 얼굴도 못생긴 레아가 품 속에 있었다. 삼촌에게 속은 것이다. 결국 야곱은 라헬을 위해 또 7년을 더 머슴을 살고야 라헬을 아내로 맞이한다. 야곱은 예쁘고 총명한 라헬만 사랑하고, 레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못생긴 것이 죄인가?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은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창29:31)고 하셨고, 늦게야 라헬에게 요셉을 주셨으며 베냐민을 낳고 죽는다. 하나님은 재고녀인 레아를 더 사랑하신 것 아니었을까? 하나님은 재고녀인 레아의 씨, 유다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을 여셨다.

복과 축복은 다르다. 복은 세상이 없어질 때 함께 사라지나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이요, 영원한 복이다. 야곱과 레아처럼, 부족하고 유약한 재고남녀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구하며 의지하여 사랑 받는 예수중심 가족이 되기를 원한다.

임택함 목사

cjcc1004@hanmail.net

겨자씨만한 믿음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

한 남자가 어린 독수리를 잡아 집으로 데려와 닭과 오리가 들어있는 우리에 넣고 모이를 주어서 키웠다. 5년 후 독수리는 거대한 날개를 갖고도 날지 못하는 닭이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동물학자가 우연히 닭장 속의 독수리를 보고는 독수리를 날게 하려고 하였으나 독수리는 날기를 거부했다. 동물학자는 독수리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웅장 한 자연 앞에 독수리를 쳐들었다. 독수리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웅장한 자연 앞에서 문득 용솟음치는 힘을 느끼고 대지를 발판 삼아 힘차게 비상한다. 이 이야기는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라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나의 삶은 그저 꿈도 희망도 없고 하루하루 아무 생각없이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닭이나 오리 같은 삶이었다. 하나님을 만나고부터는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변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일찍 일어나서 성경을 읽는다든지, 해보지 않은 것들을 기꺼이 경험해보려는 것 같은, 자그마한 변화지만 예전과는 달리 나의 삶은 답답한 삶이라는 느낌이 점차 가시고 하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가고 있다. 하나님 덕분에 나는 나의 좁은 세계를 버리고 더 넓고 충만한 세계를 향하게 될 수 있었다.

요즘 기도가 잘 안 나오고 삶이 잘풀리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기도가 잘 안 나오니 찬송이라도 하자’ 마음먹고 마음속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찬송을 하는 그 날, 날고 싶지 않은 독수리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고, 계획 없이 살던 예전과는 달리 새로운 정신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우리는 닭장 속의 닭이 아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 로서 독수리처럼 살아야 한다.

김성일

cre8tor@naver.com

신앙논객

행복한 나귀가 되자

마가복음 11장과 누가복음 19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들어 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감람산의 벳바게와 베다니 고을에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십니다. 마을에 가면 아직 어떤 사람도 태워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테니까 풀어서 끌고 오라고, 만일 누가 그 이유를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라 하시면서요. 제자들이 말씀대로 가서 나귀 새끼를 데려왔습니다. 정말 그 나귀는 아직 사람을 태워본 경험이 없고, 몸집도 작고 약한 나귀 새끼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괘념치 않으시고 나귀의 등에 올라타셨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문득 ‘왜 하필이면 경험도 없고 힘도 없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말씀,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도 기왕에 메시아요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으면, 겉으로 보기에도 준마(駿馬)이면서 힘도 좋고 경험 많은 노련한 말을 타시고 좀 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예루살 렘에 들어가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아무리봐도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영광과 찬송을 받으신 걸까?’하는 의문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익히 들었어도 100% 다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던 하나님의 성품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 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겉보기에 초라하고 내세울 것 하나 없어 보여도, 아직 어리고 경험도 없고 서툴러도, 능력 없고 부족한 것 투성이라도, 때론 넘어지고 좌절하고 낙망해도, 그런 어린나귀 같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기뻐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걸 왜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지요.

‘‘주가 쓰시겠다’ 할 때 순종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오직 위에 타신 그 분만 영광 받으시도록 쓰임 받은 그 나귀가 마냥 부럽습니다. 우리도 천국에 입성하는 그 날까지 귀하게 쓰임 받는 행복한 나귀들이됩시다.

신혁주 전도사

blessedm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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