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믿음을 확증하라 (약2:20~26)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는데 귀신이 안 나갑니까?
예수 이름으로 만물을 명령하는데 효력이 없습니까?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까?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원인도 있을 터, 제가 하나하나 짚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무엘상 4장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사사와 선지자로 사역을 시작한 직후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침공을 받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은 군사를 모집하여 블레셋에 대항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졸지에 4천명이나 되는 군사가 죽임을 당하고 패배하고 맙니다.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은 급히 실로에 있던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이겨보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법궤를 앞세우고 블레셋 적진을 향해 돌진한 이스라엘은 더욱 크게 블레셋에게 참패하였음은 물론이고 법궤까지 빼앗겼으며, 이 전투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하였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엘리 제사장은 그만 앉은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으며,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를 출산하던 중 죽음을 맞습니다.
왜 법궤를 앞세우고 나갔는데 전쟁에서 패했을 까요? 법궤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궤요, 하나님의 능력이 현현하는 능력의 궤이건만 왜 패배했을까요? 사무엘상 5장에 법궤가 블레셋 사람들 손에 있을 때 법궤가 그들의 신, 다곤을 두 차례나 넘어뜨렸는데, 왜 그때는 잠잠하셨던 걸까요? 그것은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의 행실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의 행실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이를 보면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들은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기를 서슴지 않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탈취해서 먼저 먹었습니다. 한 마디로 불량배였습니다(삼상2:12~17). 그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궤만 모시고 가면 전쟁에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착각이지요. 착각은 자유지만, 그 결과는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엘리의 아들들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면 다 나가는 줄 알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뭐든 다 되는 줄 압니다. No. 자신의 삶은 돌아보지 않고 그냥 법궤만 메고 나가면 무조건 전쟁에 이기는 것이 아니듯, 다 귀신이 나가고 다 응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같이 불량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을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량배와 동류가 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삶으로 확증되어야 합니다. 삶 자체가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예수 이름으로 귀신이 나가고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가져다 병든 자에게 대면 병이 나았다고 했는데,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온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같은 장 14절에 보니까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바울처럼 해봤지만 됐습니까? 안 됩니다. 예수의 이름은 분명히 능력이지만 나타날 만 한 자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장을 보겠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는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전에 왔으니 구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들이 착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렘7:12~13).
착각은 자유지만, 그 결과는 참으로 비참할 것임을 경고하신 것입니다(렘7:20).
마태복음 25장에는 기막힌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비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열 처녀 비유입니다. 열 처녀 모두 똑같은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줄 알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기름이 떨어진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비유말씀은 결국 “그런즉 깨어 있으라”(마25:13)로 귀결되는데, 믿음은 있으나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이 오실 때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으니 깨어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하여 각각 5달란트, 2달란트를 남기나, 1달란트 받은 자는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내놓으니 주인이 호통을 칩니다. 그러자 1달란트 받은 자가 말합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마25:24~25). 이 역시 착각한 겁니다. 그러나 결과는 혹독했습니다(마25:30). 이는 자기 믿음하나 지키는 것으로 족하지 말고 영혼구원을 위해 가르치고 전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보좌 앞에 선 모든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영생에, 왼편의 사람은 영벌에 처했습니다. 이유인즉 불쌍하고 힘든 자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불쌍한 자, 옥에 있는 자를 돌보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으로 예수를 만난 자는 가난한 자를 돕고 불쌍한 자를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 1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 주님의 왼편에 선 자들이 우리가 아니란 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착각하며 살고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나는 목사니까, 나는 장로니까 별 탈 없이 천국 가겠지’ 하고 착각하며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가는 것이지, 직분이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그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했듯이(롬5:8),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드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확증했듯이(약2:21~22), 라합이 정탐꾼을 살려줌으로 믿음을 확증했듯이(수2), 우리도 삶 속에서 믿음을 확증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확증하는 삶을 영적 예배요, 산 제사라고 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바울의 삶을 보세요. 욥의 삶을 잘 보세요. 그들이 하나님의 기대하심에 걸맞는 삶을 살았기에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았고,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교회 밖의 삶에서 예수가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하고,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엡4:1~3). 바로 예수중심의 삶 말입니다.
지금의 삶이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니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나는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하나님이 기뻐하실 삶을 살고 있는지,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착각 속에 살다가 주님 심판대 앞에서야 착각인 줄 깨닫게 되면 그 때는 너무 늦고, 그 결과는 너무도 비참합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이 당신의 삶으로 당신의 믿음을 확증할 때입니다.
할렐루야!
구원은 믿음으로
상은 행한 대로
착각은 자유지만
결과는 비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