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날 때는 위기가 온다(대하14~1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이는 ‘신앙에는 타협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신앙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부모나 자녀나 남편과 아내, 권력과 돈, 그 어떤 것도 신앙과는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갈림길에 설 때가 있습니다. 교회냐 회사냐, 부모냐 신앙이냐, 돈이냐 믿음이냐 등등 기로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위기지요. 이 때 당신은 어떻습니까? 어느 쪽을 택합니까?
“회사 다녀봐. 그게 내 맘대로 되나.”, “노모가 계셔서….”, “돈 벌어서 헌금 많이 하면 되지.” 이건 이미 타협한 겁니다. “너도 그 상황이 돼봐라. 너도 어쩔 수 없이 나처럼 할 거다.”라는 말도 신앙에서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절대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장 5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자, 그가 말하기를 “예수님, 아버지의 장례만 치르고 바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든 예수님이 당연히 ‘Yes’ 하실 거라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님은 ‘No’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9:60)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매정하신 분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는 “가족과 작별인사만 하고 오겠습니다.”라고 하자, 그것도 용납지 않으시고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고 하셨습니다. 피도 눈물도, 인정조차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신앙자세가 가히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타협하지 않는 신앙은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미리 가르치신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위기가 왔습니다. 하나님은 백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창22:2). 어마어마한 위기가 온 겁니다. 아들을 살릴 것이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것이냐, 아브라함은 기로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어보지 않고 바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향했고, 아들을 결박하여 단 위에 놓고는 칼로 내리치려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급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했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6~18).
사르밧에 사는 과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가뭄으로 먹을 것이 동이 난 과부는 조금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먹고 아들과 죽으려 했습니다. 그 무렵 엘리야가 사르밧을 지나다 그 집에 유하게 되는데, 엘리야는 먼저 그 떡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위기였습니다. 배고파 눈이 퀭한 아들을 줄 것인가, 선지자를 줄 것인가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떨리는 손으로 선지자에게 그 떡을 넘겼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에 복이 임했습니다.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왕상17:14).
입다도 하나님께 한 서원과 현실 앞에서 갈등했습니다. 입다는 ‘전쟁에서 이기면 자기를 제일 먼저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노라’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서원에 응답하사 승리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제일 먼저 반긴 자는 다름 아닌 그의 무남독녀였습니다. 입다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딸을 살릴 것인가. 그러나 그는 서원을 갚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사왕 이야기입니다. 아사왕은 남유다의 3대 왕으로, 아비암의 아들입니다. 그는 부친과는 다르게 그 조상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우상을 제거하고 종래의 산당과 태양상을 제거하는 등 율법과 명령을 준행하는데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위기가 왔습니다. 바로 그의 모친인 마아가가 아세라 목상을 만든 겁니다. 아사는 갈등했습니다. 어머니니까 눈감아 줄 것이냐, 아니면 신앙대로 할 것이냐. 그는 결단했습니다. 어머니를 폐위시키기로. 그리고 그 우상을 기드론 시냇가에 불살라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비사 35년 동안 전쟁이 없게 하셨습니다(대하15:19). 그러던 그가 변했습니다. 슬슬 타협하기 시작한 겁니다. 치세 36년에 북이스라엘의 바아사가 베냐민에 침입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는 북쪽 길을 막기 위해 라마를 건축할 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메섹 왕 벤하닷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바아사를 격퇴하였습니다. 이에 선지자 하나니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대하16:9)라고 예언했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5장에도 신앙에 타협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이성이나 돈, 권력과 가족이 신앙을 흔들면 그걸 잘라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병사는 죽어도 전쟁은 이겨야 하고 핍박과 순교가 온다 해도 예수는 증거 되어야 한다’는 목회철학을 가진 제게 신앙의 타협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목회 30년 동안 숱한 갈등을 겪었지만, 언제나 저는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부흥회와 어머니 회갑이 겹쳤을 때도 한 가문의 장손이요 장남인 저는 부흥회로 달려갔고, 교단과의 갈등에서도 타협만 하면 조용히 마무리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힘든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사랑이 제게 넘쳤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제게 배운 우리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제사 문제로 얻어맞고, 욕먹고, 심지어 이혼을 당해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는 것을 보면,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위기 때 가늠되는 것입니다. 위기 때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갈림길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아니면 영원히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요셉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이 글을 맺으려 합니다. 요셉은 일생을 하나님 편에 서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 예로 보디발의 아내 유혹 앞에서도 여자를 취해 팔자를 바꿀 것이냐, 하나님 편에 설 것이냐 기로였지만, 그는 단호히 하나님 편을 택했습니다(창39:9).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축복은 쏟아졌습니다.
여러분, 유난을 떨어야 장학생이 되고, 우등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우선 되어야 하고, 이 세상 무엇과도 주님은 바꿀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이 넘치도록 쏟아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모든 것은 타협할 수 있지만
신앙만은 타협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최우선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