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는 사랑과 믿음이 식은 결과다 (요10:1~16)
제가 파라과이 집회를 마치고 귀국한 날 밤에 한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사람들이 조용히 들어오는데, 여자들은 조선 말기 신여성들이 입었던 하얀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었고, 남자들은 검정 양복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굉장히 깨끗했고, 점잖았으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조용히 보이지 않는 담을 쌓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서로에게 꽃다발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종들이 다 소경이라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되레 그것에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꿈을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경고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경건의 모양을 갖춘 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우리 성도들로 당을 짓게 하고, 교회와 담을 쌓게 하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아름답고 깨끗했습니다. 번지르르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23장 27절에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견줄 수 있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자들 말입니다. 이들은 육적인 치장, 곧 윤리와 도덕으로 폼을 잡고 교회에 들어와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에게 인격적으로 모자라다느니, 몰상식하다느니 모욕을 줍니다. 자기들만 아름답고 깨끗한 사람인양 성서에 위배된 모습을 보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즘 교회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육적인 교회, 혼적인 교회, 그리고 영적인 교회, 이렇게 나뉘고 있습니다. 육적인 교회는 말할 필요도 없고, 문제가 되는 것이 혼적인 교회입니다. 사람의 혼을 만족시키는 교회, 말씀을 푼다는 명목아래 아름다운 말을 나열하고, 윤리와 도덕만을 강조하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 충만하여 시끌벅적해야 합니다. 마치 산부인과처럼 말입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절대로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함은 물론이고, 전도하여 새 생명을 낳기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을 낳는 동안의 고통소리와 환희의 소리도 들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고 병도 고치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요즘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왜 매일 귀신 이야기야?’라고 불평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거 문제 있는 겁니다. 마을에 간첩이 있다 하면 누가 제일 싫어합니까? 이 차 안에 소매치기 있다고 하면 누가 제일 싫어할까요? 당연히 간첩이 제일 싫어하고, 소매치기가 제일 싫어합니다. 귀신 이야기 한다고 싫어하는 사람 속에는 이미 악한 영이 들어와 있고, 귀신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싫은 겁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의 말씀처럼 믿는 자들은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잠잠하고 조용하면 죽은 교회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충만한 교회와 죽은 교회의 차이입니다. 교회는 손뼉을 치며 찬송하고, 방언기도 해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도 쫓고, 병도 고쳐야 합니다. 왜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무슨 토를 답니까? 우리를 지으신 이가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악한 것들이 승리해서 유럽이나 미국 교회가 술집으로, 박물관으로 전락한 겁니다. 악한 것들은 어떻게든 교회를 잠재우려고 합니다. 인격적인 모습, 지적인 모습,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타고 들어와 영을 잠재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깨어야 합니다. 영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매일 귀신 쫓는다고 불평하고, 손뼉 치며 찬송하고, 부르짖어 기도한다고 교양 없다하고, 지식적으로 부족하다느니 하다가는 우리 교회도 혼적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는 주의 종들이 각성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 성도들을 잘 지켜야 합니다. 여우가 양털을 뒤집어쓰고, 발톱을 숨기고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소경이면 어찌 됩니까? 양 떼 다 죽이게 됩니다. 이솝우화에 늑대와 일곱 마리 양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엄마 양이 시장 간 틈에 늑대가 손에 하얀 밀가루를 묻히고 새끼 양에게 다가가 자기가 엄마라고 속이자 새끼들이 집 문을 열었다가 늑대에게 다 죽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교회에 좀 배운 사람이 오면 감투부터 씌웁니다. 세상에 회장이요 사장이 오면 행여 다른 교회로 갈 까봐 한 자리부터 줍니다. 그들이 여우인지 늑대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교회의 직분을 맡길 때 새로 입교한 자를 쓰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하고 있건만 하나님 말씀은 뒷전입니다. 그러다 호되게 당하는 교회를 많이 봤습니다. 검증을 해야지요. 이렇게 흔들어보고 저렇게 흔들어봐야지요. 흔들면 밀가루가 떨어져 늑대라는 것을 알게 되고, 흔들면 양털이 벗겨져 여우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임직할 때 그냥 하신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검증한 후에 일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묻고 물으신 후에 그에게 양 떼를 맡기신 것입니다.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7).
더욱 어리석은 목자는 한 술 더 떠서 오랫동안 일 잘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새로 입교한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기까지 합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이지요. 이건 주객전도(主客顚倒)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박힌 돌은 주춧돌입니다. 그런데 주춧돌을 빼버리면 그 집이, 기업이, 교회가, 가정이, 국가가 제대로 서겠습니까? 이는 성경의 말씀대로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랑이 식었고,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절대 박힌 돌을 빼내지 않습니다. 그동안 예배 사회자로 세워달라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현구 장로나 김종일 장로보다 여러모로 번듯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부탁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꾸지 않았습니다. 왜냐? 그들을 사랑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해외 선교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어에 능하고, 다재다능한 자들이 합류하고 싶다고 했지만, 저는 지금까지 한은택 전도사와 송초현 전도사를 씁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굴러온 돌을 무조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쓸 만한 돌이 굴러오거든 그 돌이 박힐 때까지 기다려야 옳은 것입니다. 검증이 되고 사랑과 믿음이 쌓일 때까지 말입니다. 요즘 대형교회들이 시끄럽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믿음이 식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믿음이 식으면 별 것 아닌 것에도, 예전에는 괜찮았던 것에도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옛말에 ‘산토끼 잡다가 집토끼 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의 개국공신들, 기업의 창업멤버들, 교회의 초창기 성도들을 뽑아내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잘 난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제자들을 끝까지 쓰셨고, 다윗 역시 그의 병사 37명을 끝까지 믿었지 않습니까?
악한 것들은 어떻게든 교회를 깨고, 성도들을 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핍박도 해보았지만 별 효험이 없는 것을 알고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아름다워 보이고, 교양 있어 보이는 혼적인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기도하여 성령에 충만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랴
조급은 죄다
매사 검증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