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을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려라 (히12:1~3)
저는 이번 과테말라 집회에 가서 고메라(La Gomera) 시의 시장 부부와 데모크라시아(Democracia) 시의 시장, 그리고 두 도시의 많은 지도급 인사들이 참석한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된 것은 자존심을 버리고 배웠고, 자존심을 버리고 원조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36년 동안 강점했던 일본에게까지 가서 배웠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절대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존심은 성공의 적이고, 병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사람은 아마도 수로보니게 여인일 겁니다. 그녀에게는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렸고, 예수님만 만나면 딸이 나음을 입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녀의 면전에다 대고 수치를 안기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한 마디로 ‘개 같은 여자여. 어딜 감히!’ 이러신 겁니다. 그냥 못해준다고 하셔도 될 텐데, 그렇게까지 경멸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 예수님은 그녀의 자존심을 발로 뭉갰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까? 아닙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라고 했습니다. “개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내 딸만 고쳐주십시오.”라고 한 겁니다.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극찬하셨고, 소원을 이뤄주셨습니다”(마15:28).
또 열왕기하 5장에는 아람 곧 시리아의 군사령관인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큰 용사였으나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갑옷과 투구만 벗으면 진물이 줄줄 흐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에서 잡은 작은 계집의 말을 듣고 아람왕의 선처를 입어 이스라엘 땅으로 문둥병을 치료하러 옵니다.
그런데 선지자 엘리사는 그를 맞이하기는커녕 사환을 보내어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 몸을 씻으라고만 합니다. 그러니 천하의 나아만 장군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대노하여 자국으로 돌아가려했습니다. 그 때 그를 동행한 종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왕하5:13). “장군님, 문둥병이 낫기만 한다면야 그깟 자존심 좀 상하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마음을 돌이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니 어린 아이 살처럼 되었습니다.
다윗도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을 버린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1장에서 다윗이 사울의 눈을 피해서 이곳저곳을 쫓겨 다니다가 가드왕 아기스 앞에 가게 되는데, 이 때 신분이 노출되자 두려운 나머지 다윗은 미친 척합니다.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치광이 노릇을 했습니다.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뭐고 살고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삼상21:12~14).
또 야곱이 장자권을 탈취하고 외삼촌 집으로 도망갔다가 금의환향하는데, 형 에서가 400인을 데리고 ‘이놈! 이 날을 기다렸다.’ 하고 오자 그에게 납작 업드려 절을 일곱 번이나 하며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33:10)라고 했습니다. 절을 일곱 번하는 것은 왕이나 군주에게 절하는 예법입니다. 한 마디로 ‘살려줍쇼.’ 한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한(漢)나라의 개국공신인 한신 장군이 자존심을 버린 일입니다. 그가 불우했던 젊은 시절에 시정(市井) 무뢰배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싸우지 않을 거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무뢰배의 가랑이 밑을 기는 한신을 보고 다들 겁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후일 한신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 와서야 과거 자신을 모욕한 건달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때 왜 가랑이 밑으로 기었는지 아느냐? 내가 너를 죽이면 살인자가 되어 도망이나 다니는 신세가 되었을 거 아닌가?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존심을 죽이고 사람 같지도 않은 네 놈의 가랑이 밑을 긴 거다.” 맞습니다. 자존심을 버렸기에 그는 초왕(楚王)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존심에 관한 옛말입니다. 자존심(自尊心)이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입니다. 사람 누구에게나 이 자존심은 있고, 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정한 자존심이란 성공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망하고, 죽은 다음에 자존심이 뭐 말라빠진 거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셨습니다. 그 분은 인류구원, 곧 저와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다 버리셨습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재판관을 찾아간 과부 역시 원한을 풀기 위해 자존심을 버렸고(눅18:1~8), 여행 중에 찾아온 벗을 위하여 떡을 간청한 사람 역시 자존심을 버려 목적을 이뤘습니다(눅11:5~8).
여러분, 자존심 때문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런데 더욱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 타령하는 자들입니다. 저에게 병들어오거나 자식이 개망나니어서 상담 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울며 하나님께 매달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거라고요.
그런데 그들이 그러지 못합니다. 자존심 때문에요. 좀 배웠다는 겁니다. 좀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래봬도 박사요, 장관이요, 교수요, 회장인데 어떻게 우냐는 겁니다. 천하에 어리석은 자입니다. 예수님도 울면서 기도하셨는데, 그까짓 박사, 장관이 뭐라고 못 웁니까? 그러면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덜 급하시군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니, 아버지 앞에서 무슨 자존심입니까? 아픈데, 먹을 것이 없는데, 고통 중에 있는데, 내 앞에 문제가 산더미 같은데 무슨 자존심입니까? 구하면 다 주신다는데, 애통하면 위로 하신다는데 왜 못합니까? 진짜 덜 급해서 그런 겁니다. 아직 살만하니까 그런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권력이나 부는 먼지와 같은 것입니다.
63빌딩에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보세요. 벤츠나 마티즈나 그냥 자동차로 보일 뿐입니다. 당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의 진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허세를 버리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과정은 결과를 대변할 수 없지만, 결과는 과정을 대변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될 때 굳이 당신이 세우지 않아도 자존심은 서게 됩니다. 그 전에 잠시 자존심을 접어두는 것, 그것이 영·혼·육의 성공비결입니다. 할렐루야!
성공하는 세일즈맨은
거절당했을 때부터 뛴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열등감에서 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