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수식어는 무엇일까?
아들아!
2008년 우크라이나 키예프 집회 첫날, 집회를 주관한 필립 목사가 나를 소개한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구나.
그는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할 목사님은 21세기의 사도며, 하나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을 이해하는데 1%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예수님의 친구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친구 되시는 이초석 목사님이 나오시겠습니다!”라고 나를 소개했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단다. 예수님의 제자라 불리는 것도 감지덕지한데, 예수님의 친구라 불리니 왜 안 그랬겠니?
예수님의 친구라…. 그렇게 불리는 것은 아비의 소원이고, 또한 아비는 예수님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산단다. 아비의 믿음이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하여 ‘나의 벗’이라고 하신 것처럼 말이다(약2:23).
누군가는 또 그러겠지, 교만하다고. 감히 예수님의 친구라는 말을 어찌 하냐고? 그런 사람을 위해 들려줄 성경 말씀이 있단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나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15).
아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는 이제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부르신다는 말씀 아니니? 그걸 받을 믿음이 없는 자가 문제인 게지.
아들아!
나중에 하나님 보좌 앞에 섰을 때 천사는 너를 뭐라고 소개할 것 같으니? 네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을까? ‘박사 아무개?’ No, 대통령이요, 박사요, 정치인이요…,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수식어가 될 수 없단다. 그건 이 세상에 속한 것일 뿐,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어떻게 살았는가가 네 이름 앞에 붙을 수식어란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에 대해서 나온단다. 성경을 잘 보면 일곱 교회에 대한 수식어가 길게 쓰여 있음을 알 수 있지.
같이 보자꾸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잘 하였으나 첫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 환난과 궁핍 중에도 실상은 부요했던 서머나 교회, 믿음은 저버리지 않았으나 발람의 교훈을 따른 버가모 교회,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는 잘 하였으나 자칭 선지자라는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 살아 있으나 실제로는 죽은 사데 교회, 배반하지 않고 인내의 말씀을 잘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 그리고 차지도 덥지도 않으며 영적으로 가난하고 헐벗은 라오디게아 교회, 이렇게 장황한 수식어가 교회 이름 앞에 있지.
우리가 바로 교회란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거하시니 우리가 성전이지. 그러니 우리 앞에는 어떤 수식어가 붙을지 생각해 봐야 한단다. 수식어로 인하여 영생의 길이냐 영멸의 길이냐, 열 고을이냐 다섯 고을이냐 아니면 벌거벗은 구원이냐가 결정되기 때문이야.
‘집사지만, 교회 일에 무심했던 아무개’, ‘목에 힘만 주고 명령한 장로 아무개’, ‘성도는 돌아보지 않고 자기 안일에만 힘쓴 목사 아무개’, 이렇게 천사가 하나님께 보고 하면 영락없이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이를 갈게 될 것 아니겠니?
신앙생활은 결코 취미나 도를 닦는 기분으로 해서는 안 된다. 상을 향하여 달음박질하듯 최선을 다해야 한단다.
다시 묻고 싶구나. 과연 천사가 너를 뭐라고 소개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