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 좀 갈아 끼우게나!
여보게,
올 초에 갔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 들려주겠네. 잘 들어보고 내가 뭘 이야기 하려는지 잘 생각해보게.
나와 우리 일행은 더반이라는 도시에 있는 더반크리스천센터에서 예배를 드렸다네. 그런데 조니라는 목사가 내가 ‘예수님 찬양’을 할 때 손을 모아 돌리는 모습이 마치 전구를 갈아 끼우는 모습이라며, 목사님이 오셨으니 이제 우리 교회에 전구를 갈아 끼울 때가 된 것 같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 했네.
물론 그는 농담 삼아 이야기 한 걸세. 그러나 나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네. 성령께서 그의 입술을 주장하신 것이며, 분명히 하나님의 심오한 뜻과 계획이 있을 거라고 말일세. 아니나 다를까, 더반 교회는 빛이 흐려져 어둠 속에 잠겨 있더군. 어두우니 성도들은 다 잠을 자고 있고, 교회는 어려움으로 말도 아니었네.
그래서 내가 그 교회에 전구를 갈아 끼우려고 했지. 그런데 웬걸, 그들이 거부하지 뭔가. 그들은 이미 어둠에 익숙해있어서 갑자기 빛이 환해지는 걸 싫어했다네. 깜깜하다가 갑자기 빛이 들어오면 눈이 시려서 뜨지 못하지 않나. 눈이 아프다는 거지.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은 다 보이는데 왜 그러냐는 거야.
어두운 곳에 처음 들어가면 칠흑같이 어두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조금 지나면 조금씩 보이지 않던가. 그들은 어두움 속에서 보이는 것이 다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굳이 뭣 하러 불을 켜냐는 투였어. 그저 통탄할 수밖에.
여보게,
박쥐같은 인생들이 어디 더반 교회에만 있겠는가. 불을 켜면 오히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인생들이 어디 그 교회에만 있겠는가 말일세. 이미 어두움에 젖어서, 어두운 것이 익숙해서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생각보다 많다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당시에도 그랬네. 그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네. 그들은 그 빛 때문에 눈이 시리다며 그 빛을 없애야 한다고 우싸우싸 하고는 갖은 모함과 억지로 결국 그 빛을 없앴네. 그러나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고, 더욱 강렬하게 다시 빛났으며, 그 빛을 사모하던 자에게 소망과 생명의 빛줄기를 비추었다네.
혹 자네도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한가? 그러나 편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라네.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에 오면 물론 눈이 시리고 아프지. 그러나 잠시 견디면 밝은 빛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게 될 것일세.
흑백 같았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는지도 보게 될 것이고, 왜 내 삶이 도적을 맞았었는지, 왜 내 삶 속에서 자꾸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았는지도 알게 될 것이야. 전구만 갈아 끼워도 방이 밝아지지 않던가. 하물며 빛 되신 예수를 내 안에 모시면 내 삶이 어찌 달라지지 않겠나.
박쥐같은 인생을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 가운데 거하게나.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으니, 빛 가운데 거할 때 자네를 덮고 있던 어두움의 세력들은 떠나게 될 것이야. 그리고 그 빛을 따라 살아갈 때 영원히 빛나는 찬란한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명심하게나.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9~10).“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