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자취 (시119:163~165)
얼마 전에 동물원을 탈출한 꼬마 곰을 찾아 나섰을 때, 경찰과 동물협회 사람들이 그 곰의 발자국을 보며 청계산 일대를 수색했었습니다. 곰이 지나간 곳에 곰의 발자국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개가 뛰면 개의 발자국이 남고, 사람이 지나가면 사람의 발자국이 남습니다. 정치가는 개혁을 남기고, 예술가는 작품으로, 운동선수는 기록으로 인생의 발자취를 남깁니다. 누구든 산 흔적, 살아온 발자취를 남긴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발자취도 남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행적, 족적이 당연히 남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터키 국경에 있는 안디옥에 가면 ‘하비브 나자르’란 산이 있습니다. 하비브 나자르는 ‘목수를 사랑하는 자의 산’이란 뜻인데,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신앙을 찾아 산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 굴을 파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곳입니다. 그 산은 전체가 절벽이며 몸을 굽혀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많이 있는데, 그 구멍은 굴로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굴 안에는 돌로 만든 설교단과 성도들이 세례 받을 때 쓸 수 있는 물도 흐르고 있답니다. 이 유적지는 근래에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발견됨으로 우리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발자취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그들이 핍박 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한 흔적, 사랑한 발자취를 남겨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믿음의 선친들, 믿음의 전당에 오른 믿음의 주역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적들을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나 고향과 친척을 등지고 떠났고, 이삭은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번제물이 되는 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았으며, 요셉도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누명을 쓸망정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다니엘도,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도 하나님을 너무 사랑했기에 사자굴에, 풀무불에 던짐을 당했던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스데반 집사는 예수를 사랑했기에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어갔고,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로마에서 전도하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으며, 안드레는 그리스에서 X자형의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 베임을 당했으며, 빌립은 소아시아 부르기아에서 기둥에 매달려 죽었으며, 바돌로메는 인도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전도하다 창에 맞아 죽었고,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목 베임을 당했으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죽었고,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 대신 제자가 된 맛디아는 돌에 맞아 에티오피아에 죽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사랑한 사람들의 행적이요, 행보요, 발자취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2~3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참으로 좁고 협착하기 때문입니다. 학자가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하고, 선수가 기록을 수립하기 위해 피땀을 흘려야 하고, 시인이 시 한 수를 낳기 위해서도 산고의 진통을 겪어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아무런 대가가 없다면 그 사랑은 너무 값없어 보일 것입니다.
아픔과 핍박과 모함을 감내해야 하고,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칠 때, 그 사랑의 흔적이 더욱 진하게 남을 것입니다. 더욱이 믿음의 발자취는 후손에 의해 기려지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것이기에, 그 길이 비록 좁고 협착할지언정 마다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우리의 발자취대로 하나님은 보응하신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
우리, 지나온 세월을 돌아봅시다. 돌아보니 주님을 사랑한 발자취가 보입니까? 돌아보니 당신의 삶에 주님을 사랑한 흔적이 배어 있습니까?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아니 당신의 발자취에 세상 것만 잔뜩 찍혀 있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사랑한 삶을 살았노라고.
예수를 알기 전이야 어쩔 수 없지만, 예수를 만난 후에는 오로지 예수만을 위해 살았노라고. 예수를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았고, 예수를 사랑했기에 집에서 쫓겨났고, 예수를 사랑했기에 그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예수 때문에 핍박과 모함도 달게 받았으며, 예수를 사랑하기에 백발을 휘날리며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이것이 저의 발자취입니다. 결코 부끄럽지 않은 저의 족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예수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죽을 일 따위는 없습니다. 예수 때문에 산으로 도망해야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절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를 위해 조금 더 희생하고, 예수를 위해 조금 더 봉사하고, 예수를 위해 조금의 핍박을 받으면, 예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그것마저 못한다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진실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움직일 때 발자취가 남고 흔적도 남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분을 위해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열심을 내서 봉사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전도하며, 누가 뭐라고 해도 선한 행동으로 일관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발자취가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인생은 일생(一生)입니다. 그 일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지금 생각해보십시오. 감히 말씀 드리건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흔적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되고, 사울처럼, 솔로몬처럼 잘 나가다가 일신의 영달을 위한 삶을 살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사하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연말이면 일 년을 결산하는 영상을 만들어 보는데, 왜 그런가 하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것은 일 년 동안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후년에 더욱 열심을 내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은 우리의 발자취를 다 보실 것입니다. 행적을 내놓으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때 부끄러운 발자취가 되지 않으려면, 그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으려면, 오늘 하나님을 위한 삶,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행적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야할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쌓여 발자취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발자취를 남기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면서 그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멋진 믿음의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할렐루야!
당신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 모두는 행복한 주님의 노예다
당신은 행복한 노예의 기쁨을 아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