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어린아이가 되라 (눅18:15~17)
먼저 재밌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고양이가 유독 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겁 많은 고양이가 그만 집 뒤뜰에 있는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가기는 했는데 내려오질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오르기에는 나무가 너무 약해서 고민을 하다가 목사님은 차에 로프를 묶어 차를 전진시키며 나무를 천천히 구부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만 로프가 툭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새끼고양이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목사님은 동네를 돌면서 찾아보았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목사님은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새끼고양이를 당신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며칠 후 목사님은 아내와 함께 슈퍼에 들렀는데, 거기서 우연히 한 교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쇼핑카트에 고양이 먹이가 실려 있지 뭡니까? 사실 이 여인은 동네가 다 알만큼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기에 더욱 놀란 겁니다.
목사님은 연신 고양이 먹이를 쳐다보며 그 교인에게 물었습니다. “고양이를 그토록 싫어하면서 고양이 먹이는 왜 사셨나요?” 그러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목사님, 기막힌 사연이 있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우리 딸 아시죠? 그 녀석이 매일 고양이를 사달라고 떼를 쓰기에 제가 그랬지요. 하나님한테 달라고 하라고요.
그러면 고양이를 기를 수 있게 하겠다고요. 그랬더니 그 녀석이 아침저녁으로 정원에 나가 무릎을 꿇고는 기도를 하더군요. 그런데 며칠 전에 딸아이가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데, 글쎄 고양이가 하늘에서 사지를 펼치고 정확히 딸아이 앞에 내려앉지 뭡니까? 믿어지십니까? 그러나 정말 내 눈으로 확실히 봤다니까요. 우리 아이는 펄쩍펄쩍 뛰었지요. 하나님이 주셨다고요.” 목사님은 이야기를 듣는 도중 감을 잡았습니다. 그 고양이가 바로 당신 집 고양이였다는 것을요.
싱가포르에 있는 비홍 집사의 이야기도 들려드리겠습니다. 지난 2003년, 그녀가 한국에 두 아이를 데리고 왔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눈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그런데 6살 난 막내딸아이가 갑자기 탈이 나서 하루 종일 토하더니 탈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가까운 이대목동병원으로 후송하였는데, 의사는 진찰 뒤 급성맹장염 같으니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홍 집사는 단호히 수술을 거부하고는 딸의 배에 손을 얹고 딸을 낫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이 흘렀을까? 의사는 다시 검사해보더니 급성은 아니고 며칠 지켜본 후에 수술을 결정하자고 말을 번복했습니다. 그 때 이 소식을 들은 저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이의 배 위에 손을 얹고 20여분 가까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 아이의 배에서 갑자기 꾸룩꾸룩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비홍 집사도 딸의 배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이제 걱정하지 마. 딸아이는 깨끗이 고침을 받았어.” 하고는 다른 일이 있어 급히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가자마자 병원 측에서 초음파검사를 해야 한다고 해서 검사를 하는데 담당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참 이상하군요. 정상인데요?” 했답니다. 그 의사는 미심쩍었는지 자신의 지도교수를 불러 다시 면밀히 관찰하기까지 했으나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것은 비홍 집사가 어린 아이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치료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에게 조를 때 부모형편 봐가며 조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능력이 될까 계산해보고 조르지 않습니다. 그냥 막무가내로 졸라댑니다. 아이들은 조르면 엄마, 아빠가 다해줄 줄 아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이건 될까?’, ‘이걸 달라고 해도 되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장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쥐꼬리만 한 인간의 지식 틀 속에 하나님을 넣고 이리저리 저울질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논리나 이론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비논리요,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하는데, 감히 저는 그런 자들을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비가 없다면 뭣 하러 하나님을 믿습니까?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는 것이 신비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메추라기 떼가 몰려든 것을, 해의 그림자가 10도나 물러난 것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답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지음 바 된 피조물이 어찌 창조주를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가난합니까? 암입니까? 도산했습니까? 부도나기 직전입니까? 자식이 속을 썩입니까? 무조건 하나님 아버지께 조르십시오. 아이처럼 울며 기도하십시오. 아버지는 자식을 책임질 의무가 있고, 자식은 달라고 할 권리가 있는 겁니다.
어느 집에 딸이 둘 있었습니다. 큰 딸은 공부도 잘해서 유학까지 다녀왔고, 작은 딸은 제멋대로라 공부도 제대로 마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차서 두 딸 모두 결혼을 했는데, 남편들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오갈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큰딸은 부모에게 아무 소리하지 않고 월세 방에서 지지리 궁상을 떨고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유학까지 보내준 부모에게 더 이상 신세를 질 수 없어. 죄송해서 절대 안 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은딸은 달랐습니다. 애들을 다 끌고 친정집으로 가서는 막무가내로 도와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결국 부모는 작은 딸에게 집 얻을 돈과 사업자금을 대주었습니다.
당신이 부모 입장이라면 어느 딸이 더욱 살갑겠습니까? 어느 딸이 더 잘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모 입장을 헤아린 딸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 들어왔어? 성가셔.”라고 말은 해도 작은 딸이 정이 가고 잘한 겁니다. 왜요? 자식이니까요.
하나님은 광야에서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메추라기 떼를 보내시고, 더 살아야겠다고 울어대면 수명도 연장해주시고, 죽은 오빠를 살려달라고 하시면 살려도 주십니다. 단, 하나님을 믿을 때 그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당신의 논리나 이론을 깨고 온전히 하나님을 믿을 때 말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11:40).
열왕기하 7장에 보면 사마리아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먹을 것이 없어 서로 자식을 잡아먹는 지경까지 이른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왕이 그 책임이 다 하나님께 있다고 하자 엘리사가 예언하기를 “내일 이맘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내일이면 식량이 평상시보다 훨씬 싼 가격에 거래될 것이라고 말한 겁니다. 그런데 한 장관이 이 말을 듣고는 코웃음 치며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해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지요. 그러자 엘리사가 그에게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너는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했는데, 정말 엘리사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아람군대로 하여금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심으로 그들이 짐을 꾸릴 여유도 없이 퇴각하는 바람에 그것들이 다 이스라엘 것이 되었습니다. 단 하루사이에 곡식이 풍족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성문을 지키다가 백성들에게 밟혀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까지 될까?’ 하고 의심하는 것,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어린 아이가 됩시다. 아프면 고쳐달라고 하고, 없으면 달라고 하고, 부족하면 채워달라고 조르는 어린 아이의 신앙으로 돌아갑시다. 부모 앞에 체면 차릴 게 뭐 있습니까? 그저 아버지를 믿고 뗑깡 부려봅시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할렐루야!
믿음이 부족한 자야
어린아이에게 배워라
믿음의 역사는 남녀노소(男女老少)
유무식(有無識)을 초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