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사람을 배려하시는 하나님 (레5:6~13)
성경읽기표 대로 성경을 읽으신 분이라면 근래에 레위기를 다 읽으셨을 것입니다.
레위기를 읽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인 제사법이 제시된 중요한 장(場)으로, ‘제사장의 율법’, ‘제사의 율법’의 장(場)이라고도 합니다.
레위기에는 5대 제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제사로는 ‘번제’가 있는데, 이는 희생제물을 불로 태워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 영원한 속죄와 헌신을 다짐하는 제사입니다. 두 번째 제사법으로 ‘소제’가 있습니다. 이는 유일하게 피 없이 드리는 제사로 곡류를 불로 태워 소산물을 하나님께 헌납한다는 의미의 제사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영적교제와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제사이며, ‘속죄제’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는 제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속건제’는 하나님 또는 남에 대해 과실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기 위해 드려진 제사입니다. 5대 제사 중 소제를 제외한 모든 제사는 소나 양,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유의해서 봐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속죄제에 대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속죄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인데, 속죄제의 제물을 보면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는 수송아지를, 이스라엘 회중이 범죄한 경우도 수송아지를, 족장이 범죄한 경우는 흠 없는 수염소를, 평민인 경우는 형편에 따라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양이나 산비둘기를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5장 11절에서 12절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 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찌니 이는 속죄제라.”
형편이 너무 어려워 산비둘기마저도 못사는 자들은 고운 가루로 그것들을 대신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 그 원칙을 깨뜨리면서까지 극빈자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두신 것입니다.
이는 속죄제의 은혜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입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요, 배려입니다. 가슴이 찌릿하지 않습니까?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에 당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신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그 원칙에 예외를 두셨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할 말을 잊었고, 그 분의 배려에 너무 감사했습니다.
배려하는 삶, 이는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이십니다. 레위기 19장을 읽다보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를 또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19:9~10).
이 부분은 사회적 기득권을 갖지 못한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자 보호 규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추수할 때 율법에 의해서 밭모퉁이에 있는 곡물이나 땅에 여기 저기 떨어진 낟알을 줍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자기 기업을 갖지 못한 가난한 자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키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이웃 사랑의 대표적인 실천 규범인 것입니다.
이 배려의 수혜자가 바로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남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온 룻은 가족을 위해 이삭을 주우러 나갔고, 거기서 보아스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었으며,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살펴야 할 차례입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아야 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어야 옳은 법, 우리는 과연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배려하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저는 원칙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원칙에도 반드시 예외를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곧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희 집 안에 대사(大事)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제가 ‘7남매가 동일하게 돈을 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강행한다면 분명히 상처 입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형편이 다 좋다면야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만일 형제 중 누군가 지금 형편이 좋지 못하다면 그에게는 이 원칙이 부담이 될 것이고, 이 일로 의기소침해져서 잔치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의 마음이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그를 배려해야 합니다.
형편이 나은 자들이 조금 더 내서 일을 함께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구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역식구들이 어떤 일에 동일하게 역할 분담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형편이 안 좋거나 건강이 안 좋거나 하면 어떡합니까? 그들이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그런 것을요. 그러니 그럴 때는 예외를 둬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처럼 사고의 융통성, 생활의 융통성이 있어야 배려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어느 단체나 사회는 원칙이 있어야 바로 섭니다. 그러나 이 원칙대로만 행하면 부작용이 일 수 있고, 그 단체나 사회는 강퍅하고 살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융통성이 발휘되면 배려가 생겨나고 그 단체와 사회는 기쁨과 행복이 가득할 것입니다. 여행갈 때 딱딱한 가방에는 짐이 많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으로 된 가방은 잘 늘어나 많은 짐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동일합니다. 신축성 있는 사고가 되어야 많은 사람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배려는 가진 자들과 있는 자들의 특권으로, 사소한 것이지만 아주 위대한 것입니다. 요즈음 도로를 건설할 때보면 장애우들이나 노약자들을 위해 육교나 지하도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버스에도, 주차장에도 그들을 위한 전용자리가 있지요. 이것이 배려입니다. 초보운전자가 끼어들기를 못할 때 끼어들 수 있게 양보하는 것, 이런 작은 것들을 베푸는 것이 배려의 시작입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가서 놀랍기도 하고 생소했던 점은 바로 여자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여자들이 차에서 내릴 때면 문을 열어주고, 의자를 빼서 앉혀주고, 옷을 받아 걸어주는 그네들의 습성을 보면서 어색하기도 했지만, 약한 자를 배려하는 마음에 탄복을 했었습니다. 사실 배려라는 말은 아내 배, 짝 배(配)와 생각할 려, 걱정할 려(慮)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즉 아내처럼 내 주위의 연약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배려이니 그네들의 행동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사실 배려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나보다 없는 자, 나보다 약한 자, 나보다 못 배운 자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없는 자 앞에서 있는 체 안 하는 것, 약한 자 앞에서 힘자랑 안 하는 것, 못 배운 자 앞에서 아는 체 안하는 것이 배려입니다. 성경은 배려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15:1~2).
우리 마음을 넓힙시다. 바울은 원칙대로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를 쫓는 자들을 다메섹까지 쫓아서 잡아왔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성령 안에서 마음이 넓어졌습니다. 그의 말로 끝을 맺겠습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6:11~13).
할렐루야!
배려는 아주 사소한 것이나
배려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작은 선이라도 미루지 말고 행하고
작은 악이라도 미루지 말고 버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