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마18:1~35)
목회 초기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감명을 지나 내게 큰 충격을 주었고, 제 인생을 순간 송두리째 변화시켰습니다.
예전 같으면 세상의 기준대로 행동할 것을 ‘예수님이라면 이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고, 예전 같으면 내 생각대로 말했을 것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하면서 예수님께서 행하는 것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첫째는 낮아져 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높고 높은 보좌에서 가장 낮고 낮은 곳에 임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몸소 낮아져 섬기는 것을 본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무릎을 꿇었던 주님,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그렇습니다. 제가 25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인생은 물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분수와 폭포 같은 인생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분수는 높아지려고 애를 쓰지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높이 오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에너지만 소진할 뿐이지 결국 아래로 떨어지고 말지요.
그러나 폭포는 어떻습니까? 폭포는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오히려 에너지가 생겨납니다. 힘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 생각에는 높아지려는 자가 힘이 있는 듯하나 결국 그것은 쇠진될 힘일 뿐, 정작 낮아지려는 자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낮아져 섬기는 자를 보면 그들에게서 강한 파워가 느껴집니다. 미국의 카터 전(前) 대통령을 봅시다. 사실 그는 대통령 시절 ‘최악의 대통령’이었지만, 퇴임 후 ‘최고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낮아져 가난한 자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낮아져 가난한 자와 눈높이를 같이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기 때문에 그가 더욱 존경받고, 각광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도 낮은 곳에 임합니다. 골짜기의 물이 낮은 곳에 모이듯,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낮은 곳에 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높아지려고 안달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어깨씨름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낮아져야 높아집니다. 낮아져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우리 교회는 낮아져 섬길 기회가 참 많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눈높이를 같이하고 낮아져 그들을 섬기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고 낮아져 남을 섬기는 자들이 됩시다.
둘째, 예수님은 온유하셨다는 것입니다. ‘온유(溫柔)’란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히 길들여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훈련되어져서 길들여져 있는 품성을 ‘온유’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원래 온유한 자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욱하는 성질 때문에 살인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하나님께 훈련 받고나서는 천하에 가장 온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온유해졌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을 해도 화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했고, 모세가 구스 여인을 얻은 일로 인해서 아론과 미리암이 문제를 일으키고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을 해도, 모세는 여기에 대해서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모세에게 도전한 아론과 미리암을 나병환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이삭이 그 샘플입니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으면, 싸우지 않고 우물을 그냥 넘겨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축복을 받았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거부가 되었고, 마침내는 아비멜렉이 화친을 청해오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돌아가신 제 부친은 비록 예수는 믿지 않으셨지만 정말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의 성함이 어질 인(仁)에 복 복(福)이어서 그러셨는지, 방배동 일대에서 그의 인자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방배동 일대에서 우리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 분은 땅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와는 전혀 딴판으로 총 나간다, 칼 나간다 할 정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70년대 초에는 욱하는 성질에 경찰을 팬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 없지요. 그런 제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길들여지고 다스려지니 이제는 온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전의 저를 알던 사람들은 딴 사람이 되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사실 처음 목회를 하고 저를 비판하고 모함하던 사람에 대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지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갖다 놔라’ 합니다. 그랬더니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전 세계를 맡겨주시더란 말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이 제게 이루어지더란 말입니다.
‘온유’란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입니다. 부드러운 말, 따뜻한 마음, 분내지 않는 것 모두 ‘온유’에 속한 것들입니다. 살다보면 욱할 때도 있지요. 눈에 쌍심지 켤 때도 있고, 격한 말이 나올 때도 있지요. 그럴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연습하다보면 어느새 당신도 모세처럼 천하에 온유한 자가 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입니다.
셋째,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용서, 그것은 큰 자나 능력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큰 특권입니다. 너른 바다가 강의 오물을 정제하듯, 태평양이 바다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정제하듯 큰 자가 작은 자의 죄를 정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가장 큰 자인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의 형들보다 큰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분명 당신은 그들보다 큰 자이고, 큰 능력을 소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자가 이기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기본은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용서는 불가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연고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빚진 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에 빚진 자이며, 그 분의 용서하심에 빚진 자입니다. 그러니 누군들 사랑하지 못하겠으며, 누군들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서는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빚을 독촉하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에게 주님은 다시 빚을 물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도 다 하는 겁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많이 사랑받고, 많이 용서받은 하나님 자녀의 도리입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자가 있습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가 있습니까? 그래도 그는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고 그를 용서하십시오.
넷째,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순종하셨기에 부활하셨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저 역시 바보스러울 만큼 순종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에 속합니다. 절대 순종의 결과가 오늘의 예루살렘 교단인 것입니다.
어린 나귀가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가면서 불순종하여 고개를 들었다면 그에게 영광은 없었을 것입니다. 절대 순종이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순종의 결과는 영광임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매사 이것을 기준 삼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라
골짜기의 물이 낮은 곳에 모이듯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곳에 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