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투면 다 망한다 (마12:25~28)
제가 쓴 시(詩) 중에 ‘모래와 파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시는 십여 년 전, 제주도 앞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모래를 보고 시상(詩想)이 떠올라 쓴 것입니다. 제가 바닷가에서 보니 파도가 세차게 밀려오니까 바위는 그것을 맞받아치더군요. 그러니까 파도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물러가고 바위는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세찬 파도가 모래에게 밀려오니까 모래는 거센 파도를 다 안아 잠재우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어미가 새끼를 안듯, 현숙한 아내가 세파에 찌든 남편을 품듯 방울방울 미소까지 지으며 다 스며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거센 파도가 잠잠해질 밖에요. 저는 거기서 ‘그래, 내가 모래 같은 사람이 되면 다툼이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환갑의 나이가 되다보니 세상의 명예도, 부귀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정이 행복한 것, 그것이 제일인 거 같습니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시128:3~4)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절절히 와 닿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 말에 동의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알콩달콩 행복을 만들며 살 수 있을까요? 많은 성도들이 제게 가정문제로 상담을 해올 때 저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행복한 가정의 기본은 다투지 않는 겁니다.”라고.
그럼요,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사실 결혼해서 6개월이면 신혼의 단꿈은 물 건너갑니다. 눈에 덮였던 콩깍지가 벗겨지기 시작하지요. 점점 상대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보조개인 줄 알았는데 아내의 얼굴에 곰보자국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좀 전까지는 안 씻는 남편이 터프가이로 보였는데, 이제 더럽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예전에는 아내가 요리는 못해도 사랑스러웠는데 이제는 밥 먹을 때마다 짜증을 냅니다.
그래서 다투기 시작합니다. “곰보자국이었어?”, “그럼 물려라.”, “씻어라.”, “나중에 씻는다.”, “이걸 요리라고 했냐?”, “그럼 먹지 마라”, 이렇게 싸우기 시작합니다. 싸움은 아주 유치한 것, 작은 것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니네 집은 어떻고’, 이렇게 싸움이 커지지요. 그러다 ‘사네’, ‘안사네’ 하게 됩니다.
아마 다들 경험했을 겁니다. 그러나 부부싸움이 결코 칼로 물 베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다 진짜 갈라지는 경우를 저는 많이 봤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17:14).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을 우습게 알고 방치하다보면 언젠가 그 방축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사사로운 싸움이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이요, 결국 그것이 가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거지요. 어디 가정뿐이겠습니까? 기업이라는 방축에, 교회라는 방축에, 국가라는 방축에 물이 새기 시작하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싸우면 안 된다는 겁니다. 부부가 싸워보세요. 애들이 무너집니다. 가인과 아벨의 형제지간의 싸움이요? 결국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행복하지 못해 그런 겁니다. 노사가 싸워보세요. 회사가 문 닫고 맙니다. 정부와 국민이 서로 으르렁 거리면 국가는 후퇴해서 결국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 짝이 나는 것이고, 목사와 장로가 싸우면 교회는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부부가 살면서 안 싸울 수는 없지요. 그러나 싸움에도 기술이 필요한 겁니다. 지금 남편이 화가 잔뜩 났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내가 맞받아쳐보세요. 그럼 진짜 큰 싸움이 되는 겁니다. 남편이 화가 났거들랑, 심지어 말이 안 되게 화를 내더라도 모래처럼 받아주세요. 모래처럼 받아주기 힘들거들랑 잠시 자리를 뜨세요.
수위가 넘은 댐은 피하는 게 장땡입니다. 뜨거운 주전자를 들면 괜히 손만 뎁니다. 어디 손만 뎁니까? 물이 튀어 여러 사람 다칩니다. 그럴 땐 가만 놔두면 저절로 식어요. 댐도 물을 넘기고 나면 제 수위가 되는 겁니다. 남편이 화가 가라앉았을 때 말해도 늦지 않다는 겁니다.
좀 참으세요.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어떻게 참아요?” 그러는 분들, 우리 주님이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절대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에 대해 얼마나 오래 참으셨나볼까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주님은 100년을 2시간 24분처럼 참으사 당신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화 가라앉을 때까지, 아내가 폭발하는 그 잠시를 못 기다린다면 말이 됩니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겁니다. 절대 한 손으로는 소리가 안나요. 둘이 똑같으니까 싸우는 겁니다. 한 사람만 오래 참으면, 한 쪽이 오래 참으면 절대 다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의 열매는 바로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이 성령의 열매는 기술적인 은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로서 아니 믿는 자와 구별될 행동지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창13:8)라고 합니다.
그 이유인즉 ‘이 땅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다투면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안 사람이나 브리스 사람이 너네도 별 수 없구나.”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본이 안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싸우지 말자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주님처럼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엡2:14).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이 ‘내 새끼’ 이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툼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싫어하시느냐? 다투고 드린 예물은 받지 않으실 정도입니다(마5:23~24). 그럼 반대로 다툼을 일으키는 자는요? 마귀가 ‘이쁜 내 새끼’ 이럽니다. 마귀는 사람 사이에 쐐기를 박습니다. 쐐기를 박는 방법 중에 하나가 다투게 하는 겁니다. 아내가 남편을 오해해서, 직원이 사주를 오해해서, 장로가 목사를 오해해서 다투게 합니다. 사실 오해는 믿음이 떨어졌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떨어진 것은 모르고 상대방만 오해해서 다투는 것입니다.
‘어부지리(漁父之利)’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요새와 조개가 서로 물고 싸우니까 지나가던 어부만 횡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싸우면, 회사에서 노사가 싸우면, 정부와 국민이 대치하면, 교회에서 다툼이 일면 마귀만 좋아합니다. 마귀 좋은 일시키는 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절대 싸우지 마세요.
행복하길 원하시지요? 그렇다면 행복을 잡아먹는 암을 제거하세요. 암(癌)이란 많은 입으로 상대를 물어뜯다가 결국 자신도 죽는 대책 없는 존재입니다. 다툼이 이와 같습니다. 다투면, 싸우면 상대만 죽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 나도 상처를 입고, 나도 죽습니다. 그러니 그런 다툼은 피하는 게 상책 아니겠습니까? 사나운 파도를 잠재운 모래처럼 온유하면 싸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오래 참으면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참을 인(忍)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매일 고기반찬에, 큰 차를 타야 행복한 게 아닙니다. 화초장 놓고 매일 싸우면 그게 어디 화초장입니까? 개초장이지. 행복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할 때 생기는 발효제입니다. 그러니 다투지 마세요. 그래서 행복한 교회, 행복한 사업터, 행복한 국가를 만드세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할렐루야!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고 부부싸움에 아이들 깨진다
대화가 단절되면 오해를 낳고 오해가 길어지면 원수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