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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너희는 순수성을 잃지 말라 (삼상15:10~35)

494호 · 2009-08-14

저는 몇몇 장로님들과 기도원 근처에 장어로 유명하다는 식당에 갔었습니다. 장로님들 말이 그 집은 각종 지상파 TV에도 소개될 만큼 소문난 맛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잔뜩 기대를 하고 갔지요.

그 집에 갔더니 주인이 전통복장을 차려입고 나와서는 먹는 법을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자기 말대로 먹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다나요? 그는 절인 뽕나무 잎과 상추에 장어를 얹고 거기에 또 묵은 김치를 얹고 양념장을 발라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어보니 막상 장어 맛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뽕잎 맛에 상추 맛에 양념 맛까지 겹쳐져서 정작 장어 맛은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 식당을 나오면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장어집이면 장어 맛이 나야지.”

안 그렇습니까? 장어 먹으러 왔는데, 장어 맛은 안 나고, 양념 맛만 난다면 그게 무슨 장어집입니까? 장어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요, 장어에 소금만 살짝 뿌려서 먹는 겁니다. 그래야 장어 본래의 순수한 맛을 볼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왜 복을 못 받는 줄 압니까? 순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뽕잎에, 상추에, 양념 잔뜩 찍어 바른 장어처럼, 세상의 온갖 지식과 신학적인 견해, 상식들이 믿음을 싸고 있어 믿음이 온데간데없어진 것입니다. 뭐 하나님 말씀이 논리적으로 안 맞는다나요? 하나님의 방법은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이라나요?

그러니 무슨 복을 받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합니까? 감히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어떻게 힐문할 수 있답니까? 가당치도 않지요. 그래놓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을 받은 것은 순수해서입니다. 그는 그가 배우고 익힌 학문이 그의 믿음에 저해가 되자 그것들을 과감히 배설물로 여겨 버렸기에 능력을 받고, 사도로써 큰 사역을 한 것입니다 (빌3:8~9).

홍해가 갈라지는 것, 사람의 지식이나 학문으로 안 되는 겁니다. 그냥 순수하게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지팡이를 내밀면 갈라지는 겁니다. 여리고요? ‘소리 지른다고 성이 무너질까?’ 하고 앉아서 진동을 측정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순수하게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일곱 바퀴 돌면 무너지는 겁니다.

순수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 앞에 쥐꼬리만 한 내 지식을 내려놓는 겁니다. 제가 늘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는 무식하게 믿으라’고. 무식이 뭔 줄 압니까? 무식은 없을 무(無), 알 식(識)입니다. 곧 세상의 지식을 모르기로 작정하고 믿어야 기적을 맛볼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잘난 체 하지 말고, 아는 체 말고 순수하게 믿으라는 거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가다 왜 빠졌습니까? 생각해보니 이게 상식적으로 안 맞는 겁니다. ‘와,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어? 말도 안 돼.’ 이 생각이 드는 순간 빠진 겁니다.

왜 목사들의 설교에 은혜를 못 받는 줄 압니까? 자기도 모르는 설교를 하거든요. 히브리어를 섞어가며, 문자 써가며, 이런 설, 저런 설, 쩍쩍 거리는데 무슨 은혜가 있겠습니까? 순수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쪼개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고 그대로 전하면 은혜가 쏟아지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당신의 학문을 버리는 것, 그것이 순수해지는 겁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

둘째, 하나님 앞에 가면을 벗는 겁니다. 몇 해 전, 세계영성세미나 때 기도원 운동장에서 개회를 선언하는데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그대로 행사를 진행시켰는데, 여자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처음에는 화장 지워질까봐 얼굴들을 가리고 난리를 치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는 하도 비가 많이 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빠진 생쥐처럼 다 젖어버리고 얼굴 화장도 다 벗겨져 볼만했지만, 그들이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모습만은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럼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순수한 얼굴 아니겠습니까? 가장된 것, 가면을 벗어야지요.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심각했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것을 투구와 갑옷으로 가리고 다녔습니다. 그런 그가 소문을 듣고 엘리사에게 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자를 보내어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라고만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대노했습니다. “나를 감히 이렇게 대접해? 내가 누군 줄 알고. 내가 이래봬도 시리아의 총사령관인데.” 그러나 장군의 분노함을 보고 그의 종들이 말합니다. “장군님, 어떻게든 문둥병에서 나아야죠. 장군 명함이 대수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깨달은 나아만 장군은 노를 가라앉히고 투구와 갑옷을 벗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가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내가 시리아의 군대장관이니 엘리사가 나와 나를 맞고, 손을 얹어 낫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리아 군대장관이면 오늘날 미국의 국방장관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력실세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이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 대신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일개 군대장관이 뭐 대단한 겁니까? 애들 소꿉놀이에 불과한 인생길인데. 그리고 장관이면 부모 앞에서 ‘에헴’ 한답니까?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장관이라도 부모 앞에서는 아이인대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내가 이래봬도 장관입니다.’, ‘내가 박사입니다.’ 이러면요, 한 대 얻어맞습니다.

“나는 니 애비다.” 그러면서요. 대통령도, 박사도 부모 앞에서는 그냥 ‘엄마’ 그러는 겁니다. 어린 아이처럼요. 어린 아이는 아프면 ‘엄마 아파.’ 하고 울고, 배고프면 ‘엄마, 배고파.’, 돈이 필요하면 ‘아빠, 돈’ 이럽니다. 그럼 부모가 다 해주지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안 그럽니다. 컸다는 겁니다. 좀 됐다는 거지요. 그래서 복을 못 받는 겁니다. 체면 불구하고 투구와 갑옷을 벗어던지고 물속에 뛰어 들어야 문둥병이 낫듯, 체면 불구하고 울고 졸라야 합니다.

저는 교단에서 제명되었을 때, 설교를 못했을 때, 찬송이 은혜롭지 못했을 때, 엉엉 울었습니다. 교회의 재정이 딸렸을 때도, 성도들이 아플 때도 애통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제게 능력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셔서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마5:4)고 하셨습니다. ‘애통’이라는 낱말의 뜻 그대로 가증됨이 없이 슬피 울면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를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제발 하나님 앞에서 폼 잡지 말고 솔직하게 직고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계산하지 마세요. 빌립처럼 계산하지 말고 안드레처럼 순수해야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반장선거에 출마한다고 하면서 반 아이들을 다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놀라서 “너 뭐 믿고 이런 일을 저질렀냐?”고 했더니, 아들이 하는 말, “아빠 부자잖아요.” 저를 믿은 겁니다. 자기가 계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부자이십니다.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그러니 그 앞에 계산하지 마세요. ‘이걸 달래도 될까?’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제한하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제한을 받으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수함을 잃는 것은 첫사랑을 잃었다는 것이며, 때가 끼었다는 겁니다. 때가 어느 정도 끼면 빨고 씻어내지만, 때가 찌들면 귀한 것이라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그래서 버림을 받았고, 솔로몬의 후세가 그래서 갈림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때가 끼지 않기 위해서는 늘 씻어야 합니다. 예수의 보혈로 늘 씻으면 때가 끼지 않아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신부는 하얀 드레스를 입지요. 순수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때가 잔뜩 끼어 누렇게 변색되었다면 그 신랑이 그를 기뻐하겠습니까? 믿음이 변질된 자들, 신앙의 순수함을 잃은 자들이 예수님의 신부의 자격이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 앞에 순수한 자가 됩시다. 할렐루야!

처음은 누구나 같이 할 수 있다

마지막을 같이 하는 자가 되자

묵은 때를 벗어 버리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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