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절대 탈출구가 아니다 (삼상31:1~6)
우리는 지금 사상 초유의 사건에 직면해 있습니다. 바로 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입니다. 온 국민이 애도하며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분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하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아울러 이런 비극적 죽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람들 중 80%가 살면서 한 번 쯤은 자살에 대해 생각해봤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생길이 험난하다는 반증이겠지요. 제가 60여 평생을 살아보니까 살다보면 비포장도로도 달리고, 진흙탕에 굴러야 할 때도 있으며, 늪지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할 때도 있고,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도 있는 게 인생입디다. 흔히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하는 말이 절실하게 이해가 됩디다.
너무 힘들면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죽으면 이 고생 안 해도 되고, 죽으면 이 꼴 저 꼴 안 봐도 되고, 죽으면 내 결백이 입증될 거 같아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지요. 믿음의 선친들도 그랬더군요.
하늘 문을 연 불세출(不世出)의 엘리야도 사는 게 힘들어서 죽음을 생각했고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19:3~4),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모세도 그랬습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찐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5). 그리고 사나 죽으나 오직 주 만을 위해 살았던 사도 바울조차도 죽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후1:8~9).
‘죽을 용기로 다시 살지.’ 이렇게 야박하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왜 그런 용기를 안 내봤겠습니까? 죽을힘을 다해 다시 살아보고자 했었을 것입니다.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다는 몰라도 대략 짐작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동의할 수 없고, 옳다 할 수 없음은 그 방법이 결코 해결책도, 문제의 종지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죽으면 고통이 없을 것 같습니까? 죽으면 일이 마무리 되고, 죽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다 이해하고, 당신 입지를 다시 세워줄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 칩시다. 그게 죽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남은 가족들은 어떨 것 같습니까?
자식이 아프다 죽어도 부모 가슴에 한이 맺힐 텐데 순간 그렇게 보낸 부모는 사는 게 사는 것 같겠습니까? 당신의 아내는요? 당신의 남편은요? 그리고 당신의 자녀는 온전히 자랄 것 같습니까? 자살은 가장 사랑했던 자들에게 정말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죽으면 끝이 아닌 이유는 사후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후에는 누구든 심판을 받고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남을 죽이는 죄만 살인죄에 해당일까요?
아닙니다. 내 생명을 해치는 자도 살인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힘들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최선책으로 죽음을 택했는데, 그 고통보다 몇 백 배, 몇 천 배 더 큰 고통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는 다른 차선책이 절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죽을 것 같던 순간도 지나가고, 숨이 턱에 받치는 순간의 때도, 아픔도 다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순간만 견디면 되는 겁니다. 다윗이 사울에 쫓기고, 아들에게 쫓기는 순간도 지나가 칭송받는 날이 왔고, 한나가 브닌나에게 학대받던 시절도 지나가 사무엘을 안고 목에 힘주는 날이 왔습니다. 예수님도 고통의 날이 지나고 영광의 날이 왔습니다. 참고 견디면 분명히 좋은 날이 오는 겁니다.
저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살펴봤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자기주장이 강한 자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성에, 자신의 인격에 오점이 남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여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하는 거 같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제 말이 전혀 근거 없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사울이 왜 자살했는지 살펴봅시다.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중상을 입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삼상31:4). 그는 왕으로서 블레셋 군인들에게 당할 모욕이 두려워 자살한 것입니다. 또 왕을 살해하고 왕가의 일족을 모두 학살했던 시므리는 7일 동안 재위했으나 백성들이 세운 오므리에 의해 패하게 되자 궁전에 불을 질러 자살하고 맙니다(왕상16:18).
또 밧세바의 조부인 아히도벨, 그는 압살롬의 반란에 가담하여 밧세바를 취한 다윗을 없애려고 했으나 후새의 반대로 그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채택되지 못하면 압살롭의 반란은 100%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자살해버립니다(삼하17:23).
또한 세리인 마태를 제치고 회계를 담당할 정도로 똑똑한 인물이었던 가룟 유다 역시 자살했습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행1:18).
과연 그들이 잘한 일일까요? 정말 그들이 똑똑한 자들일까요? 살아남는 게 바보스럽고 구차스런 일이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왜 사냐?’,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해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서 회복하면 됩니다. 살아서 잘못한 일은 용서받으면 되고, 잃었던 재산도 회복하면 되고, 실추된 명예도 회복하면 되고, 망가진 자존심도 세우면 되는 겁니다.
남들이 바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살다보면 옷에 김칫국도 튀는 법이고, 때론 구정물도 뒤집어쓰는 겁니다. 그렇다고 옷을 버리나요? 빨면 되는 겁니다. 살다보면 오명을 쓸 수 있고, 인격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명을 버립니까?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늘이 부르는 날까지 무슨 일에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번 노 대통령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겁니다. 정죄하기에 급급했던 우리 자신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모두가 돌을 던져댔으니 얼마나 아팠을까요? 얼마나 자신이 비참했을까요? 정상에 서 계시던 분이었으니 누구에겐들 속마음을 털어놓았겠습니까? 누군가에게 속내를 다 털어놓고 맘껏 울기라도 했더라면,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가 있었더라면 이런 사태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혹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십니까? 안 됩니다. 마음을 돌이키세요. 먼저 당신이 떠난 뒤 당신을 사랑했던 가족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죽음 다음의 세상을 생각하세요. 너무 힘들거든 친구를 만나 속을 털어놓으세요. 친구가 없다고요? 세상의 친구보다 좋은 예수님께 심경을 털어놓고 그의 품에 안겨 엉엉 우세요. 그러면 그 분이 위로하시고, 당신의 빈속과 빈 삶을 채우실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됩니다. 죽고 싶은 마음을 접고 생각을 바꾸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살 소망과 힘과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하면 누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내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결론으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대 자살은 안 됩니다. 그것은 문제의 돌파구도 아니고, 해결책도 아닙니다. 자살은 절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힘들더라도 기도하며 갑시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된다 생각을 바꾸면 소망이 생긴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늘이 부르는 날 까지 지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