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없는 훈련은 없다 (약1:1~4)
해병대 시절, 월남 파병을 위해 차출되어 엄청나게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군함을 타고 험한 파도를 헤치며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파도가 거세다보니 훈련도중에 뱃멀미를 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뱃멀미를 하면 교관들은 그들을 가차 없이 바다에 빠뜨렸습니다.
교관들은 바다에 빠진 자들이 지칠 즈음에야 그들을 끌어올렸고, 다시 멀미를 하면 어김없이 바다에 던져버리곤 했습니다. 교관들은 그 이유에 대해 함구했으니 당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 애꿎은 훈련이고, 부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부러 뱃멀미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생각하니 교관들이 야속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반복되면서 점차 뱃멀미하는 자들이 줄어들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무리 배가 흔들려도, 아무리 오랫동안 배 위에서 훈련을 받아도 뱃멀미하는 자들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후에야 교관들이 왜 그런 훈련을 시켰는지 깨달았습니다. ‘뱃멀미를 하면 물에 빠진다’는 생각을 각인시켜 생리현상을 제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적 없는 훈련은 없습니다. 만일 목적 없는 훈련이라면 그것은 고문이고, 노역일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죄수들에게 가장 힘든 형벌은 두 개의 물통을 놓고 물을 번갈아 옮겨 담게 하는 것과 땅을 깊게 팠다가 다시 메우는 일을 반복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에게 그 정도의 일이 힘들다 할 수 있었겠습니까만 죄인들이 어느 형벌보다 힘들어했던 것은 그 일에는 목적이 결여돼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 거야?”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오해하는 말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맹목적인 훈련을 시키고, 까닭 없는 시련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훈련(training)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즉 훈련이 목적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 때문에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세계 제일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인 김연아 선수가 그냥 되었겠습니까? 타고난 자질에 의해 몇 번 스케이팅 하다 보니 그냥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겠습니까? 그게 아닌 걸 알지 않습니까? 훈련, 곧 부단한 트레이닝이 있었기 때문에, 여린 몸에 애처로울 정도의 훈련을 받아 은반의 요정이 된 겁니다. 그것은 알면서, 왜 당신이 처한 고난과 시련은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당신이 받는 훈련이 당신의 소망에 이르는 길임을 모르는 겁니까? 세상 부모도 자기 자식을 똥개 훈련시키듯 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그러시겠습니까?
모세의 훈련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죽음을 피해 하수에 던져졌고, 어미가 아닌 다른 여인의 품, 애굽 공주의 품에서 자라야했습니다. 그리고 장성하여서는 광야에서 40여년을 살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그토록 혹독하게 훈련시키셨을까요? 괜히 미워서요? 재미로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기로 미리 작정하시고 훈련하신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영·혼·육에 갖춘 자가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의 훈련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들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리고, 그 후로도 그런 대로 살만할 때면 요셉에게 인생의 회오리가 다시 몰아쳐왔습니다. 그는 이 고된 훈련이 가져올 소망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분명 계획한 바가 있으셨습니다. 바로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형제와 친척을 구원하기 위한 위치에 오르게 하기 위해 그를 굴리고 굴리신 것입니다.
처음에 해병대 시절 이야기를 했는데, 월남전(戰)에 가기 위해 차출된 자는 건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재목이 될 만한 나무를 자르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훈련해도 안 될 놈은 아예 안 뽑는다는 겁니다. 태릉선수촌에 훈련받는 자들을 아무나 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가능성이 있고, 될 성 싶은 자를 뽑아 훈련시켜 국가의 목적에, 개인의 소망에 이르게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도 되겠다 싶은 자, 할 수 있겠다 싶은 자를 훈련시켜 온전하게 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게, 당신의 목적을 이루게, 세상에 머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훈련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 뽑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운동하는 자들의 소망이 태릉선수촌에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지옥 훈련하는 그곳에 못 들어가 애달파하지 않습니까? 왜요? 훈련 자체가 좋아서 그럽니까? 아니지요. 그 훈련을 통해서 목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훈련에 입문한 자는 훈련만 통과하면 찌끼 없는 정금 같은 자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며, 세상의 머리가 될 것이 분명하니 훈련함에, 훈련이 고됨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훈련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4:11~13).
왜 하나님이 바울을 이토록 심하게 훈련하셨을까요? 그 답 역시 성경에 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로마의 시민권자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있던 바울을 이렇게 바닥으로, 벼랑으로 몰아 단련하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많은 땅과 건물을 두고도 비닐하우스에서 살게 하시고, 지하단칸 방에서 살게 하신 것, 갈 곳이 없어 깨밭에 차를 세우고 자게 하신 것, 다 훈련이었습니다. 교회가 깨지는 아픔을 주신 것, 사지가 마비되는 고통을 주신 것 역시 훈련의 일환이었습니다. 그 훈련을 통해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저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아픈 자의 고통이 어떠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의 종으로서, 영적 지도자로서 부족할 뻔한, 놓칠 뻔한 부분을 깨닫게 하셨고, 알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저를 연단하신 것입니다. 또한 교단에서 제명되게 하심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하여 세상과 음부의 권세가 감당하지 못하는 권능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훈련은 고된 겁니다. 그러나 거센 파도가 유능한 해군을 만드는 것이고, 세찬 폭풍이 나무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돛대에 쓰이는 나무는 기암절벽 끝에 서 있는 나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돛대에 쓰려면 강한 나무여야 하는데, 절벽에서 모진 바람을 견디며 자란 나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이 처한 고난과 시련은 죄의 대가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 연단을 통과하면 당신은 당신의 소망한 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훈련은 없습니다. 훈련에는 분명히 마침표가 있습니다. 당신이 기쁨으로 훈련에 임하면 넉넉히 훈련을 통과할 것이고, 영광의 면류관을 머리에 얹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 역시 목적이 있기 때문에 기쁘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리석다 해도, 우리더러 미쳤다고 해도 넉넉히 좁은 길을 가는 것은 그 나라에 이르기 위한 것이며, 그 날 상을 받기 위함이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님의 고난에 참예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할렐루야!
고난없는 영광이 없고 희생없는 승리도 없다
거센 파도가 유능한 해군을 만들고 폭풍이 나무의 뿌리를 깊게 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