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모든 것의 성장동력이다 (약 2:14~17)
올림픽 공원에서 예배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느 주일엔가, 한 노인이 예배 중에 소천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무런 고통 없이 예배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이 감사한 일이지만, 아쉽게도 그 노인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집안이어서 트집거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노인의 집에 이시대 목사를 보내며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진심과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고 장례식에 최대한 지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날 예배를 마쳤을 때 에이즈 환자가 안수를 받으러 왔습니다. 저는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환자를 사랑으로 안수하겠습니다. 지금 이시대 목사가 노인 집에 소식을 알리러 갔는데, 아무런 원망과 시비 없이 처리되게 해주세요.” 저는 그 에이즈 환자를 안수하고는 물수건으로 온몸을 다 닦아주었습니다. 온몸에는 물집이 잡혀있었고, 살이 썩어 냄새가 지독했지만 저는 그의 몸을 깨끗하게 닦아냈습니다. 그 환자를 다 닦아낼 즈음, 이시대 목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도착하여 노인의 소식을 전하니 자식들이 “교회가 죽였다”고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때마침 믿는 친척이 와서 “예배 중에 가셨는데 왜 난리냐?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냐?”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순간 모든 일이 잘 처리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감사했습니다. ‘내가 사랑으로 에이즈 환자의 몸을 씻겼더니,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도우셨구나.’ 물론 그 환자는 깨끗이 치료되었고, 지금은 사모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마음의 닫힌 철문을 여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끌어들이는 자석과 같아 내 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람들은 “예배당이 없이 어떻게 교회가 부흥할 수 있습니까?”라고 제게 묻습니다. 저는 그 까닭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들 말대로 우리 교회가 예배당이 없이도 창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교회가 병들고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듬는 교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도저히 안을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다 포용하기 때문에 여건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오아시스와 같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사람들이 애타게 찾는 곳이 오아시스 아닙니까? 세상은 모래 바람만 불어대는 사막과 같습니다. 이 사막 같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 사랑이 넘치는 곳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가 오아시스가 된다면 교회는 절로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 교회뿐입니까?
사람의 마음은 오직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아내가 당신 곁에 오지 않습니까? 남편을 탓하기 전에, 아내에게 섭섭하다하기 전에 당신을 돌아보십시오. 과연 내가 남편에게, 아내에게 사랑을 줬는지, 사랑을 실천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바람피우는 남편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늘 바가지만 긁는 아내를 사랑하라고요?” 하지도 마십시오. 당신이 마땅히 사랑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른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른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7:16). 아내가 사랑으로 행할 때, 남편이 사랑으로 감쌀 때 남편이, 아내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기업에 어려움이 왔을 때, 사원들이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합니까? 사원을 탓할 것이 없습니다. 사주가 사랑으로 사원을 대했더라면 기업이 위기를 맞았을 때, 그들은 내 집 일처럼 덤벼들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충직한 서른아홉 명의 용사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충성된 자였는지 다윗이 목이 마르다고 한 마디 던지자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블레셋 진영을 지나 베들레헴으로 가서 물을 길어왔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그들의 헌신에 감동을 받아 떠 온 물을 그들의 피로 여겨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부었습니다(삼하23:14~17). 왜 그들이 다윗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을까요? 다윗이 그들을 그만큼 귀히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기 중 ‘손자오기열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여인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아들에게서 온 기별이었습니다. 편지에는 “어머니, 오기 장군이 제 종기를 입으로 빨아줬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 편지를 읽고는 대성통곡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아니, 장군이 자식의 종기를 짜주었으면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지, 왜 울고 저러냐?”고 하자, 그의 어머니는 “우리 남편도 전쟁터에 나갔다가 종기가 나자 오기 장군이 입으로 종기를 짜주었습니다. 남편은 그 사랑에 감격하여 오기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군을 향해 돌진하다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내 자식도 이렇게 오기 장군의 은덕을 입었으니 죽기 살기로 전쟁에 임할 것 아닙니까?” 하며 울었습니다. 오기는 위나라 장군으로, 그는 병사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푼 장수로 유명합니다. 오기 장군과 함께 한 병사들이 왜 하나 같이 오기를 위해 싸웠을까요? 오기가 병사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기업의 사주가 이런 마음만 가진다면 기업이 어려울 때 그들이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돕지 않겠습니까?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얼마입니까?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위하여 희생하고 있습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엄청난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주를 따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새 계명’을 영어 성경에는 ‘새 명령(A new command)’라고 했습니다. 즉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은 사랑하는데, 이웃을 사랑하지 못해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는 자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올바른 수직적 관계라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올바른 수평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요일4:7~8).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원수 같은 사람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기에 나를 돌이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에 보답하는 자입니다.
목자가 권위의식으로 가득 차서 성도에게 명령한다면 양 떼는 다 도망갈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많은데 상처 입으며 그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권위를 벗고 사랑으로 양 떼를 품을 때 양 떼가 목자의 품으로 달려드는 것입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십니까? 그러면서 주일마다 성경을 끼고 교회에 다닌다면 옆집 사람들이 웃습니다. 새로 담근 김치라도 싸들고 찾아가서 사랑을 전하세요. 때가 되면 그들에게 예수를 전할 기회도 얻게 될 것입니다. 부하직원을 종 부리듯 하지 마십시오. 내 자녀에게 대하듯, 내 가족 대하듯 하세요. 기업이 어려울 때 그들은 손을 거두어 붙이고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어렵겠지만 피하지 말고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보세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들은 꼭 감화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오직 사랑으로만 얻을 수 있음을 아십시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11:30). 할렐루야!
백문이 불여일행(一行)이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가정, 기업, 국가를 비롯한
모든 것의 성장 동력은 사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