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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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호 목차 › 붕우칼럼

모르면 모른다고 하라

443호 · 2008-08-24

70년대 말, 서울 강남에 토지개발 붐이 한창일 때, 내가 살던 방배동의 땅도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았었다. 평생 농사만 짓던 동네 어르신들은 농사나 짓던 땅이 큰돈이 되자 어안이 벙벙해지셨다. 그런데 그 때를 틈타 사기꾼이 기승을 부렸다. 어르신 중에는 한글을 모르시는 까막눈이 많았는데, 사기꾼들은 남들보다 땅값을 더 받아 준다고 하면서 동네 어르신들을 유혹하고 서류를 들이대며 아무 걱정 말고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어르신들이 서류를 본들 아셨겠는가? 까만 게 글씨요, 하얀 건 종이일밖에. 걔 중에는 글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서 화를 면한 사람도 있지만, 모르면서 무턱대고 도장을 찍어 땅을 홀딱 날린 분도 있었다.

나는 서류에 모르는 말이 나오면 절대 사인하지 않는다. 세계를 교구삼다 보니 외국어로 된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할 때가 적지 않다. 그럴 때 나는 그냥 사인하지 않는다. 그 나라 말을 아는 자, 그것도 몇 명에게 확실한 해석을 듣고 난 뒤에 합당하다고 생각될 때야 사인을 한다. 사인 하나에 내 운명 뿐 아니라 교회의 운명이 달려 있는데, 어찌 모르고 사인을 하겠는가.

모든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모르면서 남의 말에 혹하여 결재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지 않아 영원히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창피한 일이며, 모르는 것을 아는 체 하다 낭패 당하면 어디 창피뿐이겠는가.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올라타 붙어가는 놈이 있다. 그러니 섣불리 아는 체 말고 아는 길도 물어보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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