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면 모른다고 하라
70년대 말, 서울 강남에 토지개발 붐이 한창일 때, 내가 살던 방배동의 땅도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았었다. 평생 농사만 짓던 동네 어르신들은 농사나 짓던 땅이 큰돈이 되자 어안이 벙벙해지셨다. 그런데 그 때를 틈타 사기꾼이 기승을 부렸다. 어르신 중에는 한글을 모르시는 까막눈이 많았는데, 사기꾼들은 남들보다 땅값을 더 받아 준다고 하면서 동네 어르신들을 유혹하고 서류를 들이대며 아무 걱정 말고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어르신들이 서류를 본들 아셨겠는가? 까만 게 글씨요, 하얀 건 종이일밖에. 걔 중에는 글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서 화를 면한 사람도 있지만, 모르면서 무턱대고 도장을 찍어 땅을 홀딱 날린 분도 있었다.
나는 서류에 모르는 말이 나오면 절대 사인하지 않는다. 세계를 교구삼다 보니 외국어로 된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할 때가 적지 않다. 그럴 때 나는 그냥 사인하지 않는다. 그 나라 말을 아는 자, 그것도 몇 명에게 확실한 해석을 듣고 난 뒤에 합당하다고 생각될 때야 사인을 한다. 사인 하나에 내 운명 뿐 아니라 교회의 운명이 달려 있는데, 어찌 모르고 사인을 하겠는가.
모든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모르면서 남의 말에 혹하여 결재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지 않아 영원히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창피한 일이며, 모르는 것을 아는 체 하다 낭패 당하면 어디 창피뿐이겠는가.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올라타 붙어가는 놈이 있다. 그러니 섣불리 아는 체 말고 아는 길도 물어보며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