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내가 운전해야 사고 나지 않는다 (마 16:26)
캐나다 집회를 마치고 귀국하기 까지 하루 동안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캐나다 거주 성도들이 골프나 치자고 했습니다. 그렇잖아도 ‘운동 좀 해야지.’ 하던 참이라 저는 흔쾌히 동의 했습니다. 성도들은 먼저 저를 골프용품 파는 곳으로 안내했습니다. 골프클럽이야 성도 것으로 친다고 해도 골프 화는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신발 중에서 편하다 싶은 운동화를 하나 골랐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성도들이 “목사님, 돈 걱정 마시고 제일 좋은 걸로 신으세요.” 하며 제가 고른 운동화를 거의 빼앗다시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난 제일 좋은 걸로 고른 거야. 비싼 거라고 좋은 것이 아니야. 내게 맞아야지.” 라고 말하고는 일본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제가 일본 집회를 갈 때 어느 성도가 구두를 하나 사줬습니다. 그가 “일본에 꼭 신고 가세요. 내일 공항에 가서 확인해 볼 거예요.” 라고 하길래, 어려운 처지에 사 준 것이 고맙고, 또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겠다 싶어 그 신발을 신고 일본에 갔는데, 이게 제게 잘 안 맞는 겁니다. 일본 우에노 공원 집회를 위해 사전답사 차 가는데, 얼마나 발이 아픈지 나중에는 머리까지 지끈거리는 겁니다.
그래서 신발을 벗어보니 뒤꿈치가 다 까졌지 뭡니까.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신발을 벗어 들고 일본 거리를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캐나다 성도들에게 해주었더니 성도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내가 고른 운동화를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자기에게 맞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야.”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날 그 운동화 덕분인지 공이 아주 잘 맞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내게 맞는 것입니다. 옷도, 신발도, 그리고 직업도, 배필도 내게 맞는 것을 찾았을 때 내가 폼 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며, 몸과 마음이 편할 뿐 아니라 사는 것이 즐겁게 됩니다.
의사나 검사 중 80%가 자기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고, 물질적으로 풍족함을 누리는 그들이 왜 그럴까요? 이는 그들 대부분이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부모들에게 등 떠밀려서 그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원해서, 자신들의 적성에 맞아서 의사나 검사가 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성화에, 아니면 학업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선생님들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억지 춘향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이미 다 그 소용대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에는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했습니다.
토기장이는 토기장이 임의대로 그릇을 만듭니다. 용도에 따라 큰 것과 작은 것을, 귀히 쓸 것과 천히 쓸 것을 만들게 됩니다. 우리도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만든 그릇일진대 이미 만들 때 여러 가지 용도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용도가 달란트요, 적성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울의 뒤를 이을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하기 위해 이새의 집에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큰 아들 엘리압을 보고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하자 왕으로서 합당하고 여겼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결국 여덟 아들 중에 가장 어린 다윗이 선택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수려한 엘리압이나 아비나답을 왕으로 삼지 않으시고 다윗을 왕으로 택하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윗을 왕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 잘 나타납니다.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 전 민족이 떨며 수모와 조롱을 감수하고 있을 때, 어린 다윗만이 담대함으로 나가 거인 골리앗을 상대했습니다. 어린 다윗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기 위해 다윗을 지으실 때 그러한 기질을 이미 불어넣어주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어 갖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감사함으로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다윗에게 왕의 자질이 없었거나 그가 왕의 그릇이 아니었다면 다윗은 사울에게, 압살롬에게 쫓길 때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이고, 아마도 마음의 병으로 시름시름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자기 것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맞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상담 중에 많은 성도들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차지하고,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연연하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추구하다 마음의 병을 얻고, 그것이 결국 육체를 넘어뜨리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네 것을 찾아야지. 잠언에도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18:14) 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느냐? 맞지 않는 것을 계속 하다보면 마음의 병이 생기고 그것은 결국 육체의 병을 몰고 온다.”고 했더니 그들의 공통된 말이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아내 때문에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강경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인생의 운전자는 당신이어야 옳다. 당신이 당신 인생을 운전하며 가라.” 내 인생은 내가 운전해야 합니다. 강력한 어조로 달리 표현하자면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겁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언제 사고가 잘 나는 줄 압니까? 옆에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할 때입니다. 내 인생을 부모가, 남편이, 아내가 주관하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할 때 인생이 고달파지고, 사고 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을 보겠습니다. 아담은 자기 인생을 옆의 아내의 말대로 운전했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대형 사고를 당했습니다(창3). 사울도 그랬습니다. 백성들의 말을 듣고 인생이라는 자동차를 운전했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삼상15:10~23). 삼손 역시 들릴라의 말대로 운전하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까(삿16).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옆에 동승한 아내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주관했고, 직접 인생을 운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는 아내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말했더라면 사라는 분명히 ‘당신 미쳤군!’ 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는 갈등으로 이리저리 운전했을 것이고, 목적지에 이르지도 못하고 사고를 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유혹하고 미혹하는 것은 귀신입니다. 부모와 아내가 귀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악한 것들이 미혹하는 것입니다. 왜요? 사고 나게 하려고요.
또 언제 사고가 나느냐 하면 무조건 앞차를 따라갈 때입니다.
즉 남의 것이 무조건 좋아 보여서 따라갈 때 인생은 사고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가 하얀 양복을 입은 것이 좋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처럼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외치는 자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고전12:29). 사도로 지음 받은 자가 사도가 되는 것이고, 선지자로 지음을 받아야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 각기 제 그릇이 있다는 것이지요. 간장종지가 장독대의 큰 장독이 부럽다고 장독이 될 수 있습니까? 장독이 될 수 없다면 장독대에라도 갖다놓아 달라고 해서 갖다놓았다고 칩시다.
그러나 간장종지가 장독대에 가면 큰 장독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고, 괜히 사람들 발에 밟혀 깨지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장독대의 큰 장독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큰 장독은 어쩌다 안방마님의 손길이나 타나, 간장종지는 매일 주인마님의 밥상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큰 것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고, 자기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내 인생을 운전하지 말고, 내 마음의 음성, 내 양심의 음성,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인생길에 사고 나지 않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잘하고, 무엇할 때 신나는가 생각해봅시다. 그것이 당신의 달란트요, 당신이 가야할 길입니다. 그것을 할 때 당신의 인생은 신바람 나며, 성공과 행복으로 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살고
누에는 뽕잎을 먹어야 산다
마음이 맞는 자는
우주와도 안 바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