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은 곧 관심이다 ( 마18:12~35 )
철산리에서 개척을 하고나서 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개척 1년여 만에 500여명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 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500여명이나 되는 모든 성도들의 이름을 모조리 외우고, 기도할 때마다 그 이름들을 일일이 부르며 기도했고, 각 가정의 애경사에 가능하면 다 참석했으며,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사돈에 팔촌이 누구인지 알 정도로 그들에게 온갖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이 초석이 되어 오늘의 예수중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은 교회가 너무 커졌고, 제가 해외집회를 자주 다니다보니 우리 성도들을 일일이 살피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송구스럽고, 면구스러운 마음인지라 개인전화를 3대 개설해 보기도 했었지만, 그러다보니 제가 하루 종일 걸려오는 전화에 매달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라 하는 수 없이 상담전화를 닫았습니다.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항상 우리 성도들에게 있고, 성도를 향한 제 사랑은 여전합니다.
혹 예배를 드리다가 안 보이는 성도들이 있으면 “어디가 아픈 건가?”, “시험에 들었나?” 하고 가슴이 덜컹합니다. 또 교회를 떠난 성도가 있다는 소식이라도 접하면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프고 가슴이 아립니다.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제가 해산의 수고함으로 여러분을 낳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심정이 바로 제 심정입니다. 그래서 그를 끌어내려고 전화하고 시간을 내어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만일 그가 깨닫고 돌아오는 날이면 저는 천하를 얻은 듯 기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18:13).
사랑은 곧 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임을 안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인간은 관심에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인은 자기 학식에 관심을 갖고 인정해주기만 하면 충성을 다하고, 여인은 아름답다고 칭찬해주는 이를 위해 다시 거울을 보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의 반란도 무관심한 어른들을 향한 몸짓언어입니다.
어느 왕이 신료 중 셋을 불러들여 말했습니다. “자네들에게 특명을 주겠소. 한 사람은 전국을 돌며 우리나라의 꽃에 대해 파악하고, 한 사람은 우리나라의 나무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그리고 한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모든 채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시오.
한 달 후에 보고를 받겠소.” 그래서 세 사람은 전국을 돌며 열심히 연구 분석했습니다. 드디어 한 달 후, 왕 앞에 선 세 사람에게 왕은 차례로 물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의 꽃에 대해 말해보시오.” 이에 꽃을 연구한 자가 말하길 “전하, 우리나라의 꽃은 정말 다채롭습니다. 온천지가 정말 꽃밭입니다.”고 하자 옆에 있던 다른 신하가 말을 가로채며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온통 나무뿐입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산이고 나무였습니다. 나무 종류야 말로 정말 많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한 신하도 입을 열어 “전하, 물론 꽃도 많고 나무도 많겠지만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채소가 참으로 다양합니다.
우리가 대대로 채식을 하던 민족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다 들은 왕은 신하들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경들에게 이번 일을 명한 것은 누구나 관심을 갖는 분야만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고, 그것에 애정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요. 경들이 백성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는다면 그들의 소리를 듣게 되고, 그들의 형편이 눈에 들어올 것이오. 백성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곧 그것이 애민사상이오. 부디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시오.”
우리는 대체로 잘 나가는 사람, 똑똑한 사람, 많이 가진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관심이 필요한 자들은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부족한 자, 용서받아야 할 것이 있는 자, 건강치 못한 자들이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잉태치 못하는 사래 앞에서 아브람의 씨를 잉태한 것으로 한껏 높아졌던 하갈을 봅시다. 주인을 멸시하던 하갈은 사래에게 쫓겨나 광야로 나갔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주제를 모르고 까불더니 잘 됐다.” 하지 않으시고 하갈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16:13). 또한 고난의 늪을 헤매고 있는 욥에게 하나님의 관심은 집중되었습니다.
얼마나 지대한 관심이 욥에게 쏟아졌던지 욥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욥7:19).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에 관심을 두셨습니까? 돈 많은 세리입니까? 학식을 겸비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까? 아닙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 그리고 죄인들에게 관심을 두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교회마다 부흥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만 같이 있던 성도들을 찾아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구역식구가 보이지 않아도 무감각한 자들, 단체의 대원이 교회 출석하는지 안하는지조차 모르는 무감각의 문둥병이 만연되어 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잘 나갔어. 허구한 날 사고나 치더니….” 이렇게 말하지 마시고, 무슨 까닭인지 그에게 관심을 기울여보십시오. 어쩌면 관심이 필요해서 그리 자취를 감췄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마치 동생을 본 아이가 갑자기 옷에 오줌을 지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엄마의 관심이 동생에게만 있는 것이 안타까워하는 행동 아닙니까. 당신의 조그만 관심이 그 사람을 살린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에게는 넘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없어 못 입고 못 먹고 추위에 떨고 있다면 당신이 하나님 앞에 죄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잠28:27). 지나친 이기주의가 군중 속의 고독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눈과 귀를 열어 이웃을 살핍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가족에게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어느 날 아내가 긴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했습니다. 저녁에 들어온 남편 앞에서 아내는 왔다 갔다 하며 머리를 봐주길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남편 왈, “왜 정신없게 왔다 갔다 하는 거야?” 하며 핀잔만 줬습니다.
민망하기도 하고 화도 난 아내가 “정신 나게 아예 나가 줄게.” 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답니다. 좀 과장된 이야기 같지만 부부 사이에 무관심이 위험수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관심을 가져보세요. “당신 파마하니까 더 예쁘네. 진작하지 그랬어.” 이렇게 한 마디 하면 밥상이 달라집니다. 이게 뭐 돈 듭니까? 또 회사 일로 고단한 남편에게 “오늘 왜 안색이 안 좋아요? 무슨 일 있어요?” 하면 “아냐, 아무 일도 없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아내만은 나를 살피는구나!’ 싶어 기운이 절로 나지 않겠습니까? 자녀에게도, 부모에게도 동일하게 관심을 갖는다면 나쁘게 될 자녀 없고, 효자 소리 들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구역장이, 조장이, 전도사, 목사가 성도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교회는 절로 부흥될 것입니다.
관심은 살리는 것이고, 무관심은 죽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유별난 것이라 생각지 말고 관심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시33:15). 할렐루야!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관심은 살리는 것이요 무관심은 죽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