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겸손의 차이를 알라 ( 단4:19~37 )
제가 1명을 놓고 철산리에서 목회를 시작한지 9개월 만에 500석 되는 성전이 비좁을 정도로 성도가 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 3년차가 되었을 때는 교인이 무려 3,0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뭔가 ‘됐다’ 싶은 저는 25평 규모에 당회장실을 꾸미고 서점에서 책을 세트로 들여와 장식을 해 놓고는 갖은 폼을 다잡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갑자기 사지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무엇에 묶인 것처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불러보려고 해도 소리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제 사지를 군대귀신들이 잡고 있었고, 제 눈앞에는 대장 귀신이 저를 향하여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 지금껏 없었습니다. 그 때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지금까지 내가 잘나서 일사천리로 목회가 성공한 것이 아니구나.” 그제야 저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교만했었습니다. 저는 제가 잘난 줄로 착각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교만했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한참을 회개하고 나서 “예… 예… 예… 예수”를 부르니 조금씩 목이 트여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라는 소리가 크게 터져 나오자 다가오던 대장 귀신이 떠나가고 사지를 잡고 있던 군대귀신도 떠나가 꼼짝도 하지 않던 제 팔, 다리가 자유자재로 움직였습니다.
저는 교만의 끝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교만이 불러올 화가 무엇인지 정말 잘 압니다. 그래서 절대로 교만하지 않기로 작심하고, 행여 곧은 목이 될까봐 때때로 저를 돌아보며 책망합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교만은 잘난 체할 교(驕)와 업신여길 만(慢)으로 이루어진 말로, 스스로 잘 난체 하며 건방지고 방자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안하무인이요, 오만방자함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오늘 본문은 느부갓네살 왕이 치세의 확장으로 인해 자기의 업적과 권세를 자랑하고 스스로 교만하여질 때, 하나님의 심판의 음성을 듣게 되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진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한 꿈을 꾸었는데, 한 나무가 자라 하늘에 닿았고, 그 잎사귀가 아름답고 그 열매가 많아서 거기에 깃든 동식물이 많았는데, 한 순찰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나무를 그루터기만 남겨두고 베어버렸고, 그는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에게 임할 일로, 왕이 사람에게 쫓겨나서 짐승처럼 일곱 해를 지내게 된다고 다니엘이 해몽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왕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으나 왕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단4:30). 하나님은 교만한 느부갓네살에게 그 꿈이 응하게 하셔서 그는 광야에서 소처럼 풀을 뜯고 몸이 이슬에 젖으며, 머리털이 독수리 털 같고 손톱이 새 발톱처럼 되어 짐승처럼 칠년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기한이 차매 그루터기를 남겨주신 하나님이 다시 그에게 총명을 주사 그는 예전의 영광을 찾게 됩니다. 이제 그에게서 오만방자했던 지난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만이 만왕의 왕이요, 만국의 왕이 되심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단4:37).
교만의 대상은 자아(自我)입니다. 자아를 다스리지 못하여 자아가 살아나면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좀 됐다 싶으면 궁둥이에서 뿔이 나게 되고, 목에 힘이 들어가게 됩니다. 좀 살만 하면 눈을 아래로 깔고 사람을 내려다봅니다. 그래서 잘 된 사람이 있답디까? 당연히 없습니다.
우리는 악한 마귀의 작태를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너, 하나님 믿지 마”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 다녀야지. 그런데 말이야, 네가 이제 조장이잖아. 그러니 너무 굽실거리지 마. 체통이 있지.”, “네가 그래도 사장인데, 체면이 있지, 안내를 어떻게 서겠어? 그러니 교회만 다녀.” 이렇게 부추깁니다. 그래서 점차 겸손을 밀어내고 교만하게, 거만하게, 오만하게 만들고 결국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 아담이 왜 넘어졌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왜 먹었습니까? 그것은 마귀가 아담의 자아, 언제나 틈만 있으면 높아지려는 자아를 살짝 건드린 겁니다.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그래서 아담을 넘어뜨린 것입니다(창3:5).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람도 교만한 자를 멀리하고 싫어할진대 하나님이야 말하나마나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목수의 아들로 오심은 낮아지심의 표현이요,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도 겸손함의 본이 되심입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도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더불어 겸손한 자가 존귀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중국의 선교사로 많은 일을 했던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교만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자 테일러가 반문했습니다. “무엇에 대해 교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자 테일러는 말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겁니까?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룬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나의 자랑거리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비롯된 것임을 시인하고 인정하면 교만의 싹조차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는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배운 자신의 모든 지식을 배설물이라고 여기고, 오직 하나님께 받은 지식과 지혜로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목에 힘이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저 역시 오늘의 제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잘 나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요, 제가 대단해서 ‘예수중심세계하나되기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저는 늘 겸손을 몸에 익히려고 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나’를 앞세울 때는 사울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제사장직을 침해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등 하나님께 범법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야 말하나마나 비참한 것이지요.
우리 겸손합시다. 남편에게도 교만을 떨면 남편 마음이 떠납니다.
와스더처럼 말입니다. 사회에서도 교만을 버립시다. 교만하다 보면 왕따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겸손합시다. 주의 종이 먼저 낮아져 겸손하면 사람이 몰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조장, 구역장이 겸손하면 그 구역은 절로 부흥됩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면 어디로 갑니까? 물은 낮은 골짜기에 모입니다. 산봉우리에 모이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낮은 자, 겸손한 자에게 몰립니다. 우리 겸손합시다. 할렐루야!
경고를 무시하면 경고도 너를 무시한다
겸손은 천국의 열쇠이나 교만은 패망의 열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