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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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안경을 바꿔 끼면 상대가 다시 보인다 ( 마7:3~5)

370호 · 2007-03-28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험하기 위해 한 학교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 내용은 이렇습니다. 동일한 영어 선생님이 A반과 B반에 들어가서 가르치게 했는데, A반의 학생들에게는 먼저 “이 선생님은 유학파로 영어에 관한 한 최고다. 여러분은 행운아들이다. 이런 선생님께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라고 말해주었고, B반에게는 “당초 유명한 선생님을 모셔올 생각이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맞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영어전공이 아닌 선생님을 모셨다. 이해해주기 바란다.”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영어 선생님은 A반과 B반에 들어가 동일한 내용으로 영어수업을 했습니다. 수업을 마친 후에 이 영어 선생님의 실력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앙케트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두 반 학생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A반의 학생들은 ‘정말 대단한 실력자다’라는 반응인데 비해, B반의 학생들은 ‘형편없는 선생님이다’라는 평이 나왔습니다. 왜 같은 선생님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수업을 듣고 이렇게 상반된 평이 나왔을까요? 그것은 이미 학생들이 가진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A반 학생들은 ‘저 선생님은 실력자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혹 선생님이 발음상 실수를 했다고 해도 “원래 저렇게 발음하나보다.”라고 생각했지만, B반의 학생들은 ‘별로 실력 없는 선생님’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 아무리 제대로 된 미국식 발음을 구사해도 “너무 혀 굴리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빨간 안경을 쓰고 있으면 온 세상이 빨갛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도 빨갛고, 나무도 빨갛고, 사람들도 다 빨갛게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편견(偏見)입니다. 이 편견을 이겨낼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편견이 무서운 이유는 편견이 편견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바로 정죄로 이어진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30년 동안 아버지인 요셉을 도와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서 자란 것을 다 보아온 사람들인지라 그 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요셉의 아들이 메시아라고? 돌았군.” 그들은 이미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안경을 쓰고 있었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비난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6:3).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지혜의 말씀을 전하고, 그의 손으로 능력을 행해도 그들이 ‘목수의 아들’이라는 안경, 즉 편견을 내어던지지 않는 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을 뿐 아니라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열두 번 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을 뵙기 전에는 예수를 믿던 사람들을 찾아내어 결박하고 처단하는 일을 담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변화되어 다메섹의 각 회당에서 제자들과 함께 전도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는 “아니, 저 자가 누구야?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던 자가 아니냐? 그가 지금 예수를 전하고 있지 않는가. 저건 분명히 함정일 거야. 예수를 전한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해서 결국 다 잡아가고 말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과거 사울이라는 인물 그대로의 안경을 쓰고 있었기에 변신한 바울의 모습이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행9:20,21).

어떤 사람이 과거에 도둑질을 해서 전과가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오이 밭에서 신발 끈을 매느라 고개를 숙이면 “분명히 오이를 훔치려고 저래.” 이렇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이라는 안경을 쓰면 정말 오이를 훔치려고 고개를 숙였을 지라도 “신발 끈이 풀렸나보구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느냐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미움의 안경’을 쓰면요, 똑똑한 사람은 잘난 척하는 것으로 보이고, 착한 사람은 어수룩한 것으로 보이며, 얌전한 사람은 내숭떠는 것처럼 보이고, 활기찬 사람은 까부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안경’을 쓰면 잘난 척하는 사람이라도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고, 어수룩한 사람일지라도 착한 사람으로 보이며, 내숭떠는 사람마저 얌전한 사람으로 보이게 되고, 까부는 사람조차도 활기찬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안경을 쓰고 있습니까? 당신의 아내나 남편, 자녀에 대해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당신의 목사나 전도사, 그리고 이웃에 대해 어떤 안경을 쓰고 쳐다보고 있습니까? 바라건대 미움의 안경, 과거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현재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안경으로 바꿔 끼기를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과거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편견 그대로를 가지고 계신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죄나 허물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8:12).

남의 아내를 훔친 다윗의 죄도 기억치 않으시고 그를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하셨으며, 베드로의 허물을 덮으시고 그를 당신의 수제자로 세우셨고, 여섯 남자를 갈아치운 여인의 수치를 싸매시어 그를 당신의 증인 삼으신 주님처럼, 우리도 남의 죄와 허물이 보이는 안경을 벗어버립시다. 남의 죄와 허물이 보이는 것은 내 눈에 들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티끌이 들어있으면 사물이 흐리게 보이고, 내 안경알이 맑지 않으면 뿌옇게 보이지 않습니까.

한 여인이 매일 맞은 편 아파트에 사는 노인을 쳐다보았습니다. 차를 마시다보면 자연히 맞은 편 노인이 사는 아파트 쪽으로 눈이 갔습니다.

노인 혼자 사는 모습이 가련하기도 하고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점차 노인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은 “노인네, 유리창 청소 좀 하지. 잘 안 보이잖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의 집을 대청소하면서 유리창도 닦았습니다. 대청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서 습관처럼 맞은 편 노인 집을 쳐다보니 어제와는 달리 아주 잘 보이는 것입니다. “노인네가 유리창 청소를 한 모양이군.” 하던 여인은 “아차! 오늘 우리 집 유리창을 닦았지. 지금까지 잘 안 보인 까닭은 노인 집 유리창이 더러웠던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유리창이 더러웠던 이유에서였구나.”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맞습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 들보 때문에 남의 눈에 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즉 내가 빨간 안경을 쓰고 있으니 사물이, 사람이 다 빨갛게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빨간 안경, 즉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저울의 중심점이 한 쪽으로 기울어 있으면 제대로 무게를 달 수 없지 않습니까? 생각이 이미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어떻게 진실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그것이 현재와 무슨 상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요. 이제 당신이 쓴 잘못된 안경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안경, 새 계명인 사랑의 안경을 쓰십시오.

그러면 만물이 다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고, 만인을 다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빨간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인다

비판하면 비판을 받고 대접하면 대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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