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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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돈보다 충실한 하인은 없다 ( 마25:14~30 )

364호 · 2007-02-13

세종 때 영의정, 우의정을 지냈지만 생활이 청빈했던 정승 유관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대문 밖에서 살았었는데, 여름철 장맛비가 퍼부을 때의 일입니다. 장대비가 쏟아지자 낡은 유관의 집 지붕 여기저기서 비가 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책을 읽고 있던 유관이 얼른 우산을 펴들고는 다시 책을 읽더니 혼잣말을 합니다. “아휴 이렇게 비가 오는데 우산도 없는 사람은 이를 어떻게 견디나?” 그러자 심란해 있던 그의 아내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뱉었습니다. “우산 없는 사람은 미리미리 다른 준비를 했겠지요, 뭐. ” 그러자 머쓱한 유관이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청빈(淸貧)사상, 뭔가 세속을 벗어난 고차원적인 삶을 대표하는 사상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상의 틀을 파(破)하고자 합니다. 사심이 없는 청렴(淸廉)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가난(貧)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돈이라는 것과 아예 담을 쌓아 그것으로부터 미혹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다시 말하면 돈을 다스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이 청빈사상을 추앙하는 자들이 꽤 많습니다. 믿는 자가 좋은 차를 타고 다녀도 죄요,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살아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만 대속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난까지도 대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악은 뿌리부터 잘라야 하니까 가난하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 이 사람 역시 성경을 잘못 읽은 겁니다. 잘 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분명히 ‘돈을 사랑함이’라는 말씀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죄입니다. 돈을 사랑해서 그것이 목적이 되어 끌려 다니는 것은 분명한 죄나 돈을 좋아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Love”와 “Like”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우리 솔직하게 대답해 봅시다. “당신은 돈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저는 돈을 좋아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빼고 돈처럼 좋은 것이 없습디다. 돈은 배신하는 법이 없고, 언제나 제 가치만큼 충실히 봉사하는 하인이요, 충신입디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잠10:15). 제가 세상에 있을 때 돈이 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친구도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심지어 저보다 연배가 높은 사람도 주저 없이 제 앞에서 낮아지더군요.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고,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돈의 위력이 그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 사람들이 돈에 혈안이 되고, 돈의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돈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돈을 절대로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돈 많은 청년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에게 주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내가 이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많은 재산으로 인해 고민하다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 청년이 부자이기에 천국에 못 들어 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청년이 돈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돈에 집착해서 주님 말씀대로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가난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소유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만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누고 베풀라는 말씀이지요.

자기 먹을 끼니도 없는 사람이 남 돕는 것을 보았습니까? 저는 못 보았습니다. 자기 배도 못 채우는 데 어떻게 남의 배에 신경 씁니까? 교회는 구제사업에 힘쓰고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교회 꾸려가기도 벅차다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마음은 원일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믿는 자들이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청렴한 부자, 나눌 줄 아는 부자, 하늘나라에 심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매달 해외선교를 나갑니다. 제가 나갈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드린 귀한 헌금을 선교자금으로 들고 나갑니다. 그래서 집회를 배설할 때 필요한 것을 보충하기도 하고, 혹 가난한 목자들을 만나면 그들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날로 부자가 되고, 잘 되어서 헌금을 많이 하면 저는 그것을 들고 더 많은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이 베풀며 더 많은 곳에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이래도 돈이 일만 악(惡)의 뿌리입니까? 일만 선(善)의 뿌리가 아닙니까?

가난한 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가난은 경멸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 따뜻하게 품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예수님은 최고 경영자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 주인이 타국에 나가면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다른 한 사람에는 한 달란트를 각각 주고 갔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회계하는데,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았던 자는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는 한 달란트 그대로를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내어 쫓았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대로 각기 충성하라는 깊은 메시지가 담긴 말씀이지만, 경영학적 측면으로 보면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는 부자가 되는 길을 제시하신 말씀이며, 땅에 묻어두지 말고 재테크하라는 말씀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을 혐오스럽게 바라보지도 말고,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그들을 보고 격동하십시오. 브닌나로 인하여 한나가 격동했듯이, 정실 자식과 장로들 때문에 입다가 격동했듯이 “나도 부자가 되어 남에게 주며 살아보리라. ” 하며 격동하십시오. 그래야 당신 삶에 사무엘 같은 결실이, 입다처럼 원수의 머리에 앉는 반전의 드라마가 전개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돈타령을 한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가난한 것을 보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래서 먼저 부자의 개념을 바꿔 드려야 부자가 되리라 생각하실 것 같아 아비의 심정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청빈하리라’ 생각지 말고, “부자가 되어 청렴하게 살겠다”,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겠다”, “가난한 이웃을 보살피겠다”고 생각하십시오. 이 목적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면 분명히 당신 손에 들릴 돈은 가치 있는 것이 되고 일만 선의 뿌리가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난한 자는 사랑의 대상이나 가난은 경멸의 대상이다

돈은 제대로만 쓰면 일만 선의 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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