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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행5:12~16)

349호 · 2006-11-01

지난 주 우리는 1992년 4월,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렸던 집회광경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14년 전의 영상 테이프를 다시 돌린 취지는 이렇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우리가 살 길은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때처럼 전혀 기도하고, 전혀 찬송하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이다.’

14년 전의 영상을 보면서 성도들은 한결같이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과거 우리가 저토록 뜨겁고 열정적이었느냐?’며 서로에게 반문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저도 무척 감명 받았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잡을 수 없듯 덧없이 흘러버린 세월이야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그 때 분출되는 열정과 성령의 능력은 제 가슴을 마구 흔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그 때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는 길이고, 그것이 교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며, 그것만이 우리가 세계를 예수중심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1984년, 철산리에서 1명을 놓고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저는 늘 7시간씩 기도했고, 몰려드는 성도들과 함께 하루 4시간씩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의 종들은 물론 평신도 모두 능력을 받아 방언을 말하고 귀신을 쫓아내곤 했습니다. 정말 대단했지요. 철야예배는 보통 11시에 시작해서 새벽 4시까지 했는데 아무도 불평하거나 피곤해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토요일이 공휴일도 아닌 시절이어서, 예배장소에서 바로 출근을 해도 다들 기뻐 어쩔 줄 몰랐답니다. 잠실벌에서 드려진 철야예배는 당시 명소로 꼽힐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것을 시기한 교계로부터 온갖 탄압을 받기는 했지만,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다시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요즘 저는 기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잠실 올림픽 공원에서 다시 철야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 성도들의 영혼을 깨우고, 심령에 불을 댕기고픈 마음에서입니다.

대한민국 교회마다 성도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방송을 통해 들었습니다. 문을 닫는 교회도 많고요. 천주교와 불교는 그 수가 늘어나는 추세인데, 유독 기독교인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답답하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딱 하나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면 됩니다. 교회가 왜 죽어가는 줄 압니까? 교회가 혼이나 달래주는, 혼이나 충족시키는 문화적인 것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교회, 멋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뭔가 지식적으로 상통하고 격상된 분위기가 꽤나 괜찮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 깨어 있어야 하고, 내 영 안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충만해야 교회가 살고, 성도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1세기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전혀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서로 모이기에 힘쓰고, 구제하며, 말씀을 상고하고 능력을 받아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쳤습니다. 어떻게요? 성령의 권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입니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47:1). 손뼉을 치며 기도해야 합니다. 경건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으로 거룩하게 행하는 것이지, 무조건 침묵하는 엄숙한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뼉을 치며 기도하고, 거룩한 두 손을 들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120문도가 조용히 묵상하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성령이 임해야 나가 전할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24:49). 성령을 받은 후에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연장 없이 논에 나가봐야 힘만 들고 성과는 없는 것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고 내 열심만 가지고, 의욕에 넘쳐서 전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나가 과감히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초대교회 성도들은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했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습니다. 사도들 뿐 아니라 집사들도 동일했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6:8). 아이가 방아쇠를 잡아당겨도 표적을 맞출 수 있습니다. 총알만 장전되어 있다면요. 노인이 스위치를 올려도 불은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기사와 표적은 주의 종들의 전매특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 받은 모든 자의 것입니다. 서울 교회 박 장로님의 아내 되신 백 권사님은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지자 당황하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중풍을 일으키는 귀신은 나가라.”고 명령하여 남편을 고쳤습니다. 하마터면 평생 중풍 맞은 남편의 시중을 들어야할 상황이었는데 그의 믿음이 남편뿐 아니라 자신도 구한 것입니다.

교회 뜰을 밟는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17:34, 35). 이는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믿는 자라고 다 천국에 데려가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를 데리고 가실 것 같습니까? 말하나마나 성령으로 충만한 자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어디서 떨어졌습니까? 무엇을 잃어버린 겁니까? 첫사랑입니다. 뜨겁던 열정이 식은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침에 면도를 하려고 전기면도기를 켰는데 이게 작동이 안 되는 겁니다. ‘왜 그렇지?’ 하고 보니까 전기코드가 빠져 있더군요. 그 때 문득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전기코드가 빠지니 전기제품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충전된 배터리를 다써버리면 반드시 충전시켜야 하는구나.’ 누구나 아는 단순한 진리에 제가 지나친 반응을 보인 것 같습니까? 제 반응은 우리에게서 성령이 빠져있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심오한 진리를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아무짝에도 소용없듯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고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고, 호시탐탐 노리는 악한 마귀의 궤계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 있으면 악한 것들도 알아봅니다. 대제사장들과 관원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몰라보았던 예수님을 귀신들이 먼저 알아보았던 것을 아십니까? 마가복음 5장에 군대귀신이 그랬습니다. 원래 어두운 데 있는 것이 밝은 곳의 것을 잘 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거든요.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국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을 소멸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불을 댕겨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을 힘입어 일했던 것처럼, 우리도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우리 가정이, 우리나라가, 그리고 내 자신이 사는 길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갑시다.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할렐루야!

21세기 교회가 사는 길은 1세기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불 아궁이에 던져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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