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과 신령이란 무엇인가? (요4:23,24)
몇 해 전, 대구에서 집회를 마치고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는데 차가 밀려 그만 출발시각보다도 5분이나 늦게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허겁지겁 뛰어 갔지만 이미 탑승 게이트는 닫히고 말았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큰 것을 깨달았습니다.
‘천국 문도 한 번 닫히면 안 열릴 텐데… 문 열렸을 때 정신 차리고 주의 일을 해야지.’
저는 예배 시간이 지나면 교회 문을 잠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문에 ‘천국 문이 이미 닫혔습니다.’라고 써 붙이고요. 그 문이 정말 천국에 입성하는 문이라면 당신은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늦었다면 말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전도사 시절, 학교 스승이었던 조만식 선생이 그 교회 장로로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조만식 장로가 급한 일로 손님을 만나다 예배 시간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조만식 장로가 막 신발장에 신발을 넣으려고 하는 순간에 주기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 조만식 장로는 신발을 든 채 그 자리에 섰습니다. 그 상태로 설교가 끝나고 주기철 목사님은 “장로님, 기도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신발을 든 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큰 잘못을 했습니다. 사람 만나느라 하나님 전에 늦게 왔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용서해주시고, 주의 종에게 심려를 끼친 것을 용서해주시고, 장로로서 성도들에게 본이 되지 못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조만식 장로가 매주일 예배에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 한 번 늦은 겁니다. 조만식 장로 같은 분이 늦을 때에야 얼마나 다급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주기철 목사가 속이 좁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중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왕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궁(宮)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 “내일 궁으로 오전 10시까지 시간 엄수하시고 나와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차가 밀릴 것도 계산하고, 가서 화장실 들릴 시간도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출발할 겁니다. 왜냐하면 왕의 말은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왕보다 못한 분입니까? 주일마다 예배에 늦는 당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하나님을 뵐 시간에 늦을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만왕의 왕이요, 우리의 아버지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예배에 늦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6).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예배 시간에 늦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증한 제사장들이 성전 출입하는 것을 보시고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 라고 하셨습니다. 왜 제사장들에게 가증하다고 하셨는가 하면 그들이 형식적으로 제사와 예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예배에 안 나오자니 조금 꺼림칙하고 오자니 귀찮아 예배가 시작되고서야 오는 당신은 가증한 제사장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런 당신을 보고도 ‘누가 문 좀 닫아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주일은 공일(空日)이 아닙니다. 주의 날, 주인의 날(主日)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방한했을 때 그는 주일이 되자 만사를 제쳐두고 여의도의 한 침례교회에 나가 그가 늘 했던 것처럼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세상 일이 바쁘더라도, 정말 일주일 내내 힘들어 도저히 일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주일예배 시간에 빠지지 말고 늦지 맙시다.
세상일을 제쳐두고 당신이 교회로 발걸음을 재촉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예비한 복을 풀어놓으실 것이고, 지친 몸을 이끌고 예배에 나오는 당신을 위해 당신 앞의 장애물을 옮겨놓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읍시다. ‘선데이 드레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일에 입는 옷은 보통 때의 옷과 구분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 입니다. 결혼식에만 가더라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나가면서 집에서 입던 꼬깃꼬깃한 옷을 입고 슬리퍼나 끌고 마치 시장가는 것처럼 가면 되겠습니까? 예수가 나의 신랑일진대 신랑 앞에 나오는 신부가 머리는 빗었는지 안 빗었는지 모를 지경이고 허드레옷이나 대충 입고 나간다면 신랑은 아마 줄행랑을 치고 말 겁니다.
나이지리아 집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거기는 아직 미개하고 경제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곳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에 올 때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와야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가장 아름답고 단정하게 하고 나와야 합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에는 다들 하나같이 너무도 아름답고 화려하게 차려입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안 했던 겁니다.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유명 메이커 옷을 입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게 했을 뿐이고, 예도(禮度)를 가르쳤을 뿐입니다.
“교회에 아무렇게나 입고 오면 어때? 주님은 가난한 자의 친군데.” 하며 반박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그들이 부유케 되고, 그들이 건강하게 되며 평안하기를 원하셨던 것이지 그들과 같이 가난을 부둥켜안고 살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 낡은 옷을 입고 왔다고 못 들어온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낡은 옷일망정 빨아서 깨끗이 입고 오는 그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입던 옷을 빨고 다리는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감동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하나님이 새 옷을, 새 옷을 입을 형편을 허락하시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남들 눈이 있으니까 잘 입고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체면 유지하자고 좋은 옷 입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공경하여 복 받으라는 말입니다.
어느 날, 금은보석 도매점에 들렸는데 아름다운 보석이 있기에 인상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백화점에 갈 일이 있어 보석가게 앞을 지나갔는데 그 가게에서 본 그 보석과 똑같은 것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값을 물어보았더니 도매상보다 값이 거의 두세 배나 되는 것 아닙니까. 단지 고급백화점에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같은 보석이지만 환경이라는 옷을 바꾸어 입으니 그 값이 두 세 배로 뛴 것입니다. 옷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들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옷을 천박하지 않게, 품위 있게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대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기 전에 우선 외모로 당신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값은 자기하기 나름입니다. 세상에도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깨끗하고 단정하고 아름다운 것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외식을 하자고 해서 회사 앞에서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가 머리는 불끈 묶고 화장도 안하고, 집에서 입던 후줄근한 옷을 입고 ‘여보’ 한다면 그 남편 얼굴이 어떨까요? 당신이 그 남편이라면 어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동료들이 볼까봐 ‘어서 가자’하고 앞장서 가버릴 것입니다. 남편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남편을 존경한다면 그렇게는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다음 주부터는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단정한 모습으로 그 앞에 나오리라 믿습니다.
약속은 생명입니다. 하나님과의 시간약속부터 지키시고, 그 앞에 예를 갖추십시오. 그것이 생활로 직결되어 세상에서도 약속을 지키고, 품격과 품위를 갖춘다면 당신은 영·혼·육에 성공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은 그림자도 비뚤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에는 벌과 나비가 오나 더러운 것에는 벌레만 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