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깨끗한 자를 쓰신다 (딤후2:20~26)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신나합니다. 저도 해병대 출신이기에 ‘귀신 잡는 해병대’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침을 튀겨 가면서 그 시절 이야기를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제 동기 중에 좀 덜렁거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식판을 대충 닦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뭐, 조금 있다 다시 먹을 건데…” 하면서 늘 물 한 번 흘리고 맙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자기 식판을 들고 밥을 타려고 줄을 섰는데, 그 친구 식판에 밥풀이 안 떨어진 것을 그만 직속상관이 보게 되었습니다. 상관은 바로 그 친구를 열외 시킨 후 오늘 저녁은 굶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네가 개, 돼지냐? 더러운 그릇에는 밥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 그 친구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먹어도 배고픈 시절인데, 고된 훈련 뒤에 한 끼를 굶는 것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이 친구는 식사 후면 식판이 닳도록 빡빡 문질러 닦았습니다.
맞습니다. 더러운 그릇에는 음식을 담을 수 없습니다. 어릴 때 우리 어머니는 틈만 나면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지푸라기에 재를 묻혀 놋그릇을 닦곤 하셨습니다. 놋그릇은 닦지 않으면 시꺼멓게 변하기 때문에 자주 닦아야 반짝거려 어른들 진짓상이나 손님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귀한 놋그릇이지만 시꺼먼 그릇에 밥을 먹을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에 맞는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64:8).
하나님이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우리를 만드심은 필요한 곳에 가장 알맞게 쓰시려고 하심입니다. 어떤 이는 간장종지로, 어떤 이는 장독으로, 또 어떤 이는 금그릇으로, 어떤 이는 은그릇으로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릇의 크기에 대해, 그릇의 재질에 대해 더러 불평을 하고 불만을 토로합니다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릇의 크기에는 괘념치 않으시고 오로지 그 그릇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를 보시고 사용여부를 결정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다윗과 사울의 경우를 봅시다. 사울은 재질로 보면 금그릇이었습니다.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삼상9:2). 하나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이 출중한 사울의 외모 때문에 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사울은 암나귀를 잃어버려 찾을 수 없을 때도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 그의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깨끗한 자였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지명됨을 알고는 자신을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한 자니이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겸손한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점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직분을 침해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명령에까지 불복종했습니다. 그릇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더러운 그릇은 쓰시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릇을 닦았더라면, 그가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 했더라면 버림을 당치는 않았을 텐데요.
그에 반해 다윗은 어쩌면 목기(木器)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예선(豫選)해 놓으신 차대의 왕을 찾으러 이새의 집에 들어갔을 때도 다윗은 그의 형들이 놓고 간 양들을 지키고 있을 정도로 형들에게조차 부림을 당하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아버지조차도 그를 제사에 참석시키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기름을 부으사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깨끗함을 보신 것입니다. 그는 정말 모든 일에 정직했고 깨끗했습니다. 그런 그도 우리아의 처를 범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단 선지자의 말에 바로 깨달아 회개했습니다. 더러워졌지만 바로 닦아 깨끗한 그릇이 되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쓰신 것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란 그릇을 깨끗하게 닦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그릇이라도 그대로 두면 먼지도 앉게 되고, 더러운 이물질이 끼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보는 것이 죄요, 듣는 것이 다 죄인 세상에서 정결하게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릇을 닦으면 다시 깨끗한 것처럼, 회개하면 다시 성결한 자가 됩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제 나름의 철칙을 정했습니다. 그것은 ‘큰 자가 되기 전에 깨끗한 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큰 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깨끗한 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저는 깨끗하지 않고 큰 자가 된 자들의 말로가 대체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처럼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세상도 그러할진대 하나님은 어쩌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깨끗한 그릇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깨진 그릇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깨진 그릇이란 부정적인 자들을 말합니다. 가나안을 정탐하러 간 10명들처럼 부정적인 자들에게 대해서는 하나님은 언급조차 회피하십니다. 다만 더러워진 그릇에게 ‘지금 닦지 않으면 내가 버린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 입니다.
당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이 보실 때 깨끗한 자입니까? 당신은 당신이 제일 잘 압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속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 봐서는 근사하지만 그 안은 구더기가 득실거리며 더럽기 그지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볼 때는 경건하고 올바른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식하는 자였습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성도로서 깨끗해 보일지 모릅니다. 주일성수는 물론 봉사도 잘 하고, 온갖 교회 행사에 참여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세상에 나가면 쾌락을 벗 삼고, 돈이나 명예 앞에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그런 자는 아닌지요? 시기, 질투, 모함이 내 안에 가득하고, 이생의 자랑으로 목이 곧아 있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당신도 외식하는 자입니다.
주님이 귀히 쓰시는 일꾼의 조건이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깨끗케 하여 거룩하게 하는 자이며, 둘째는 주인의 쓰임에 합당한 자이고, 셋째는 모든 선한 일에 예배함이 되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크기에 관계없이, 재질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애지중지 하시며, 귀히 쓰십니다.
내 영이, 내 육이 더러워졌습니까? 그러나 깨지지 않았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닦아내면 됩니다. 회개하면 지난 일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당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나게 하실 것입니다. 요새 그릇 닦는 세제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우리 죄를 닦는 세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그 보혈로 닦아내면 정결케 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우리 어린 시절이면 가위질을 하면서 ‘고물 팔아요.’ 하는 고물상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뚫어진 냄비며, 고철덩어리를 들고 나가 팔아 엿을 사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고철은 용광로에 들어가 다시 멋진 제품으로 탄생하지요. 더럽고 고철 같은 우리도 예수 안에 들어가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왜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줄 압니까? 그릇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모가 더러운 그릇에 밥을 담겠습니까? 아무리 비싼 금그릇일지라도 똥이 담겨 있으면 똥그릇이 됨을 기억하시고, 지금 예수의 보혈로 영·혼·육을 깨끗하게 닦으십시오. 할렐루야!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내 마음에 변화가 있어야 주위에 변화가 일어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