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계속 써나가자 (욥5:8-11)
초창기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능력이 대단했습니다. 누구나 귀신을 쫓고, 믿음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하루 2, 3시간 기도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로 인해 성령의 역사가 엄청나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핍박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예전만 못합니다. 예전보다 우리의 신앙이 안일해졌고, 우리 교단의 신앙의 고유빛깔이 바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기쁜 소식을 접했습니다. 우리 교단의 현 상황을 바로 인식하고, 바로 잡을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서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시대 목사입니다. 이시대 목사는 “총회장 목사님의 해외집회가 잦고 길어지니 제가 번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제가 결론 내린 것은 ‘이제는 작은 소가 일할 때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총회장 목사님이 행하는 능력을 바라다보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에 이제부터 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으로 귀신을 쫓고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언제까지 심방 가서 말씀으로 위로나 해주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위로는 일시적 치료지만 문제의 원인인 귀신을 내쫓아주면 수술을 해주는 격 아닙니까? 이는 저 혼자 각심하고 노력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첫사랑을 찾고 부르짖어 기도하여 다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성도들이 됩시다” 라고 성도들을 독려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는 우리 교단과 교회의 앞날이 투명하고 창대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능력을 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이단소리를 들었습니까?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했기 때문이었지 않습니까? 귀신을 쫓는다고, 병을 고친다고, 방언을 말한다고 못 들을 소리 들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귀신도 쫓지 않고, 성령의 역사도 일으키지 않고 이단이라고 손가락질 받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예루살렘 교단의 초석을 세우는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은 잘 알 것입니다. 저는 늘 그 초석 위에 기둥이 되어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시대 목사가 이제 자기의 자리와 사명을 깨달아 예루살렘 교단의 기둥이 되어준다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이 말씀에서 보다시피 예수님과 같은 능력,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을 받는 데는 단 하나의 조건밖에는 없습니다. ‘나를 믿는 자’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분이 이 땅에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의 것이 되고, 예수님의 권세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임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가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능력과 권세로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그렇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여리고 같은 문제를 허물고 홍해 같은 문제를 가르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가 죽은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문화적인 옷을 입혀 변질시키고, 도덕적인 옷을 입혀 예수님을 그저 군자의 반열에 서 계시게 하고, 우리가 지식의 옷을 입혀 학자나 명설교자로 만들고 있기에 예수님은 역사하시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예수님은 최고의 문화를 가지셨으며, 도덕적으로 완벽하시며,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십니다. 그러나 그 위에 하나 더, 전능하신 하나님과 능력의 하나님이 되심을 나타나야 합니다. 그 분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성을 보고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어떻게요? ‘믿는 자들은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 다시 말해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각적인 효과가 청각적인 효과 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 제가 전 세계에 다니며 구령(救靈)사업을 어떻게 합니까? 능력의 하나님을 직접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냉담한 자라도 목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성이 나타나는 데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심방 가는 것 좋습니다. 힘든 자나 병든 자를 찾아가 위로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말로 위로한다고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이름으로 그들의 병을 고쳐준다면요? 그들의 문제를 예수 이름으로 뚫어준다면요? 더 나아가 우리가 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할 줄 안다면 어떻겠습니까? 스스로 다 해결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한나는 무자(無子)했습니다. 이 때문에 브닌나에게 큰 멸시를 받았습니다. 남편인 엘가나는 한나를 더 사랑하여 제물의 분깃을 브닌나와 자녀들의 갑절을 주고 위로했으나 한나는 이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통곡하며 기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그가 엘가나의 위로와 사랑에 만족했더라면 사무엘은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 목사님들의 심방에 만족하고 있다면, 가난하다고 구제하는 손길에 만족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날마다 제자리걸음만 할 뿐입니다. 기도하여 능력을 받아 귀신을 내쫓고 가난을 내쫓아야 합니다. 원인을 제거해 버리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도 천국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기도해야 나옵니다. 제자들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들린 자를 어찌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이 그 귀신을 쫓고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하수구를 뚫을 때 압축기에 바람을 세게 넣어야 뻥 뚫리는 것과 같습니다. 1시간의 기도와 4시간의 기도의 능력, 위력은 천지차이입니다. 만 원은 만 원의 가치이상을 할 수 없고, 십만 원은 십만 원의 가치를 발휘하지 않습니까?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귀신을 잘 쫓았는데 요새는 안 나가요. 왜 그렇죠?” 그것은 기도의 양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밤에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총구를 쑤셔서 닦는 일입니다. 총구가 녹슬면 아무리 총알이 장전되어 있다하더라도 절대로 총알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하더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능력을 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교단을 세우신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교회 중에 하나로 우리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들어 사도행전을 계속 쓰기를 바라시는 특별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뜻을 우리 교회가 잊는다면 하나님은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교회를 이랬는데…’ 하며 과거나 회상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가 역사를 일으키며 하나님의 사심을 증거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계속 써내려가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속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예루살렘 교단과 예수중심교회가 됩시다.
할렐루야!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고생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자녀가 모인다
청각적인 효과보다 시각적인 효과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