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은 담대한 자의 것이다 (사41:10~14)
대학 면접 때나 입사 면접 때를 생각해 볼까요? 면접관 앞에 서면 며칠 동안 외우고 준비했던 답변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머릿속이 멍하기만 했던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데, 분명히 다 아는 것인데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얼굴만 벌게 가지고 대충 얼버무리고 나왔던 일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긴장하고 겁먹어서 그런 겁니다. 겁을 먹는 순간, 두려워하는 순간 마치 전원이 나가 실내가 어두워지듯 우리의 생각이 단절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전혀 떨지 않고 할 말 하고 나오기도 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다 피력하고 나오는 친구들은 진짜 담력이 대단해 보입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압니까? 배짱입니다. 담력 말입니다. 외국인의 얼굴을 대면하고 서툴고 앞뒤가 안 맞지만 담대하게 아는 대로 말을 해야 외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신앙생활이나 인생사에서 성공하려면 담력은 필수요건입니다. 엘리야가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을 보고 아합에게 ‘비에 막히지 않게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라고 말한 것은 확실한 믿음인 동시에 대단한 담력을 말해 줍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는데 먹구름도 아니고 겨우 손바닥만 한 구름을 보고 자기에게 감정조차 좋지 않던 아합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보통 담대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담력 앞에 어찌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1991년, 올림픽공원 사이클 경기장에서의 일입니다. 그날 태양은 왜 그리 내리쬐는지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태양을 마주보고 설교를 해야 하는 저는 눈조차 바로 뜰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통성기도를 시키고 하늘을 보니 조각구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구름아, 태양을 가릴지어다.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구름은 태양을 가려라.” 어디서 그런 담력이 솟았는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분명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작은 구름이 딱 태양을 가린 것입니다. 지금도 성도들의 탄성과 감사가 귀에 쟁쟁합니다. 만일 제가 ‘명령해도 안 될지 몰라’ 하고 두려워 떨었더라면 절대 그와 같은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뙤약볕 아래서 예배를 드리느라 고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셨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담력이란 것이 어디서 오는가 생각해 보았더니 이것은 믿는 곳이 있어야 나온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 음주운전이나 사고로 경찰서에 붙들려온 사람들이 큰소리 칠 때 대체로 뭐라고 합니까?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내 친구가 청와대에 있어! 내 전화 한 통이면 니네 밥줄 다 끊겨!” 뭐 이런 내용이잖습니까? 뒤에 뭐 믿는 데가 있다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믿는 곳이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천지만물의 주인이시오, 만물과 만인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이것보다 더 큰 배경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보다 의지될 만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두려워 떨 필요도, 주눅 들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해외집회에 나가 ‘오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가짜 목사요’ 라고 담대히 말하는 것도 다 믿는 곳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싸우러 나갈 때 뭘 믿고 나갔습니까? 자신의 돌 던지는 솜씨를 믿고 나갔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믿었던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그래서 담대할 수 있었고, 자신 있게 물매를 던져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만일 겁에 질렸더라면 절대 물매를 골리앗에게 명중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이야기를 해볼까요? 한밤중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다들 유령인 줄 알고 놀라니 예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오라고 하시니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예수께 갑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믿었기에 ‘만일 주시거든’ 이라고 했고, 담대히 물 위를 걸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몇 걸음 물 위로 걸었을 때 풍랑이 이는 바다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몰려왔고 결국 그는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늘 악한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 파도를 봐라. 아마 널 삼킬 거야.’ 그래서 두려움에 떨게 하고, 겁을 먹게 하고, 안절부절, 노심초사 하게 하여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게 하고, 성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앞에서 담대함은 믿는 곳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질책하신 내용이 무엇인 줄 압니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였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담대하지 못한 것은 예수를 완전히, 온전히 믿지 못한 연고입니다. 악한 마귀의 궤계에 놀아나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최악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담대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은 까닭이었습니다. 이번 인도 집회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악재가 난무합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 이에 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처럼 온전히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비형의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담대함을 가지고 적극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뒤에 내가 있으니 놀라지 말고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영·혼·육에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담대하십시오. 이번에 있었던 일본 독도 탐사와 관련해 우리나라의 대응책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면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신은 물론 국민들의 자존심은 다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에 대해 초강력 대응책을 내세웠더니 그들이 협상 테이블에 나온 것입니다. 시합을 할 때도 초반에 기선제압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사나운 개도 눈을 부릅뜨면 꼬리를 내리는 법입니다. 성경에도 천국은 담대한 자의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두려우면 생각의 전원이 꺼지고, 상상력의 스위치가 내려져 아무 생각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시험장에 겁을 먹고 들어가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무대가 두려운 가수나 배우는 자기 역량껏 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은 엄마 치마폭에 쌓여 자라서 기백과 패기, 담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장애물 앞에 포기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자살을 하곤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담력을 키워주고, 더욱이 뒤에 누가 계신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이 험한 세상을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위대한 정치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한 데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대장부가 되라’, 즉 ‘담대하라’ 이것입니다. 미인을 아내로 얻고 싶습니까?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습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싶습니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라보고 놀라면 솥뚜껑보고도 놀라는 법이니 담대함을 가지십시오.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 할렐루야!
전의를 상실한 군인의 총은 더 이상 무기가 아니다
소인배는 뇌동하나 군자는 뇌동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