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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다 (고전15:12~22)

321호 · 2006-04-19

참 아름다운 4월입니다. 꽃들이 만발하고 나무마다 물이 올라 온 천지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4월이 더욱 아름다운 까닭은 부활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고, 우리 죄를 대속하사 속량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분이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었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해서였고, 그가 징계를 당하심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며, 그가 채찍에 맞으심은 우리가 나음을 입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사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셨고, 악한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셨습니다.

부활은 ‘다시 부(復)’와 ‘살 활(활)’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부활은 다시 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활 이전에 죽음이 전제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맞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논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과 기쁨 이전에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 이 말씀은 우리도 예수와 함께 못 박혀야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죽음이 없는 부활은 언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부활에 동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육을 쳐서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과 상반된 것들, 하나님의 뜻에 거역된 것들을 쳐서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던 사망의 법이 영생으로, 저주와 가난, 그리고 질병이 축복과 부유, 그리고 강건함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내 생각이 죽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죽지 않으면 부활은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맨 처음 죄가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최초의 사람인 아담이 아내의 말을 듣고 자기 생각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곧 죄란 하나님의 생각을 져버리고 내 생각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가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 후에야 도착하신 예수를 보고 두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생각을 버리고 내 말을 믿으면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자기의 생각을 접고 ‘내가 믿나이다’ 할 때 나사로가 살아나는 부활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요나는 하나님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사악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가당키나 하냐?’ 이것이 요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다시스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잔악무도한 앗수르인들까지도 사랑하사 회개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기 생각대로 행한 요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큰 물고기 뱃속이었습니다. 그가 삼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자신의 생각을 버렸을 때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을 버릴 때 하나님은 살아 움직이십니다. 당신의 생각을 죽이세요. 그래야 당신의 삶에 부활의 역사가 임할 것입니다.

또 하나 죽여야 할 것은 내 뜻입니다. 이는 내 계획이요, 내 의지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예수님도 육신을 입으셨기에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 쉽지만은 않으셨습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께서는 자기의 뜻을 접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부활하셨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아시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성령의 뜻은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에 있지 않았지만, 그는 자기 뜻대로 소아시아 서북에 위치한 드로아 앞까지 갔습니다. 자기의 의지대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마게도냐에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야 그의 뜻을 접고 유럽의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10). 사도 바울이 자기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에 그를 통해 유럽이 복음화 되었고, 그것이 세계 복음화의 교두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우리의 영·혼·육에 부활이 임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여야 할 것은 내 지식입니다. 사도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최고의 지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고백한 말이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우주 안에 무수히 많은 은하계가 있고, 한 은하계에는 또 무수히 많은 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런 한 은하계에 속한 아주 작은 행성입니다. 그 지구 안의 한 나라, 한 도시,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큰들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식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쥐꼬리만 한 지식에 하나님을 어찌 담을 수 있겠습니까? 태평양에서 물 한 바가지 푼 격이 아닐까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

우리의 지식으로는 절대 지팡이를 내밀어 홍해가 갈라지는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소리 지른다고 성이 무너질 수 있습니까? 머리 자른다고 힘이 없어지나요? 정말 이것은 우리의 상식이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십니다. 우리의 지식 틀 안에서 하나님은 일하실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주인의 생각이 종의 생각이고, 주인의 뜻이 종의 뜻이며, 종은 주인의 지식 안에서 삽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선이고, 제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요,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삶에, 제가 행하는 모든 것에 부활의 꽃이 만발함을 깨닫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바로 당신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이 무덤 밖으로 나오실 수 있게 돌을 옮겨놓으십시오. 당신 삶에 주님이 개입하실 수 있게 하십시오. 당신의 생각과 뜻, 그리고 지식을 죽여 장사지낼 때 비로소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릇이 비어있어야 채울 수 있습니다. 씨앗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당신의 생각대로 말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가정을 이끌고, 교구를 이끌어보세요. 분명히 가정이 살아날 것이고, 교구가 재생할 것입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지 말고 사업을 하나님의 뜻대로 가보세요. 분명히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잿더미에서 장미꽃이 만발하듯 아름답게 다시 필 것입니다. 당신의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식 앞에 이 나라를, 교회를 내어 맡기세요. 반드시 발전하게 되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과 기쁨에 동참하려면 먼저 내가 죽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는 것은 인간의 쥐꼬리 만한 지식이다

그릇을 비워야 채울 수 있고 씨앗이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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